우리 나라 사람이 당(唐)·송(宋)·원(元)의 빈공과 또는 제과(制科)에 급제한 경우는 많았다. 신라시대 처음 숙위유학생(宿衛留學生)으로 시작하여 9세기에는 사비유학생(私費留學生)이 증가하면서 빈공과에 급제한 자가 나타났다.
최치원(崔致遠)의 후손인 최해(崔瀣)는 820∼906년 사이에 당나라의 빈공과에 급제한 신라인이 58인이라 하였고, 다시 907년부터 오대말(五代末)까지 32인이 급제하였으나 여기에는 10여인의 발해인(渤海人)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였다.
특히 신라 말 육두품으로서 빈공과에 급제한 자가 많았는데 최치원·최승우(崔承祐)·최언위(崔彦撝) 등은 그 대표적인 인물로, 이들은 후삼국시대의 지성인으로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송나라의 빈공과에 급제한 사람으로 김행성(金行成)·강진(康鄑)·최한(崔罕)·왕림(王琳)·김행적(金行績)·강무민(康撫民)·권적(權適)·조석(趙奭)·김단(金端) 등은 고려의 과거에 급제한 뒤 유학하여 급제하였으며, 대부분 귀국하여 문한관(文翰官)으로 명성을 떨쳤다.
원나라의 제과에서는 안진(安震)·최해·안축(安軸)·안보(安輔)·조렴(趙廉)·이곡(李穀)·이색(李穡)·이인복(李仁復)·윤안지(尹安之) 등이 급제하였으며, 명나라의 과거에는 김도(金濤)만이 급제하였으나 빈공을 곧 폐지하였다.
고려시대의 과거제에는 빈공과가 없었으나, 전기에 제주(濟州)의 성주(星主 : 牧使)인 고씨(高氏)에게 빈공으로 응시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 과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