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전기 「취음」, 「추일」 등의 시를 쓴 여항시인.
개설
생애와 활동사항
자신의 시에서 군함과 수운을 맡고 있는 전함사(典艦司)의 노예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있으나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허균(許筠)은 그가 궁궐의 열쇠와 왕명의 전달을 책임을 맡은 액정서(掖庭署)의 사약(司鑰)이 되었다고 기록하였는데, 잡직이기는 하지만 정6품의 자리였다.
그가 어떠한 경로로 그 지위까지 올랐는지 알 수 없으나, 그의 시를 본뜨는 시체(詩體)를 사약체(司鑰體)라 이름하였다. 대체로 만당(晩唐)의 풍을 본떠 위약(萎弱)한 시를 지었다고 일컬어졌다.
1590년(선조 23)에 통신사 허성(許筬)이 일본으로 사신 갈 때에 함께 갔었으며, 뒤에 순변사 이일(李鎰)이 ‘일본의 일을 잘 안다’ 하여, 데리고 가다가 상주에서 싸우다가 패하여 군중(軍中)에서 죽었다.
같은 천인으로 시를 잘 지은 유희경과 함께 백대붕이 유희경(劉希慶)과 친한 벗으로서 시를 주고받아 책 한 질(帙)이 되니, 당시의 경대부들이 모두 허여(許與)하였다. 같은 처지의 위항인끼리 모여 시를 짓는 모임인 풍월향도(風月香徒)를 주도하였다.
그의 시는 「취음(醉吟)」·「추일(秋日)」 두 편밖에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인 시세계는 알 수 없으나, 세상에 만족하지 못한 원통한 심사와 울적한 기운[불평원울지기(不平寃鬱之氣)]을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허균(許筠)은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백대붕(白大鵬)이라는 자가 일찍이 문지기를 했는데 또한 시에 능해 그의 동류(同類)들이 모두 그를 본받았다. 그의 시는 맹교(孟郊)와 가도(賈島)를 배워 고담(枯淡)하고 연약했던 까닭에 권필(權韠)은 만당(晩唐)을 배우는 사람을 볼 때마다 반드시 문지기체라고 일컬었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 『학산초담(鶴山樵談)』
-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 『일사유사(逸士遺事)』
- 『희조질사(熙朝軼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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