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여(郭輿: 1058~1130)의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몽득(夢得)이다. 어릴 때 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이름을 ‘여(輿)’라고 지어 주어 그것을 본명으로 하였다고 한다. ‘여(璵)’자를 쓰기도 하였다.
청주 곽씨는 곽상(郭祥)을 시조로 하는데 곽상의 4대손인 곽원(郭元: ?~1029) 때에 중앙으로 진출하였다. 곽원은 996년(성종 15)에 급제한 후 형부시랑, 한림학사가 되었으며, 1017년에 지공거가 되었다. 이후 우산기상시, 형부상서 등을 거쳐 참지정사로 승진하였다. 그는 청렴하고 문장이 능하다는 평을 받았다. 곽원의 손자인 곽상(郭尙: 1034∼1106)은 처음에 소리(小吏)였는데 선종의 잠저 때에 빈객이 되었다. 선종 즉위 이후에 감찰어사, 추밀원좌승선, 전중소감 등을 지냈으며, 1103년(숙종 8)에 수사공으로 치사하였다.
곽여는 1058년에 곽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083년(문종 37) 과거에 합격하였으니 이자현(李資玄)과 동방(同榜)이었다. 이자현, 이중약, 김황원, 정지상, 김부철, 홍관, 그리고 승려인 담수 등과 교유하였다. 특히 김황원, 이중약 등과는 문장과 청담(淸談)으로 벗이 되었으며, 사람들은 이들을 ‘신교(神交)’라 칭송하였다.
1083년(문종 37)에 과거에 합격하여 내시(內侍)에 속하여 합문지후(閤門祗侯)가 되었다가 홍주사(洪州使)로 나갔다. 이때 고을 바깥의 시냇가에 작은 집을 짓고 장계초당(長溪草堂)이라 이름 붙이고 공무 중에 여가만 생기면 이곳에 가서 휴식하였다. 홍주사의 임기를 마치고 예부원외랑이 되었다가 곧 사직하고 금주(金州, 지금의 김해)에 은거하였다.
1113년(예종 8) 3월에 예종의 부름을 받고 개경으로 올라왔다. 예종은 궁중의 순복전(純福殿)에 머물게 하고 선생으로 칭호하였다. 오건(烏巾)에 학창의(鶴氅衣)를 입고 항상 예종의 곁에서 조용히 담론하고 시를 지어 주고받으니 사람들이 그를 금문우객(金門羽客), 즉 궁중 도사(道士)라고 불렀다. 예종은 그가 오랫동안 궁중에 있으므로 혹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을까 하여 서화문(西華門) 밖에 별장을 지어 주었다. 결국 곽여가 궁중에서 물러가서 은거할 것을 요청하자 예종은 개성 동쪽의 약두산에 집을 지어 살게 하였다. 호를 동산처사(東山處士)라 하고 거처하는 방을 허정당(虛靜堂), 서재를 양지재(養志齋)라 이름 하였으며, 예종이 친히 편액을 써서 하사하였다.
하루는 예종이 동산재에 갔다가 곽여가 마침 도성에 가고 없자 벽에 시를 써 놓고 돌아왔다. 이에 곽여는 예종을 보지 못한 것에 대한 화답시를 지었다. 1115년(예종 10) 6월에 곽여는 송으로 사신 가는 왕자지와 문공미를 전송하는 연회를 자신의 별장에서 열고자 예종에게 요청하였다. 그러자 예종은 주과(酒果)를 내려 주고 내관(內官)에게 준비하도록 명하였는데, 연회가 지나치게 성대하여 사람들이 비난하였다. 1116년 4월에 서경으로 순행하였을 때 예종은 곽여를 불러 상안전 뒤 화단에 자리를 마련해 주고 친히 술과 음식을 하사하며 시를 짓게 하고 예종도 화답하였다. 또 여러 종친과 곽여를 불러 연회를 베풀고, 시를 짓고 곽여에게 화답하게 하였다.
곽여와 예종은 군신 관계 이상의 친밀한 사이로 서로 시를 주고받았는데, 이에 『예종창화집(睿宗唱和集)』이 나오게 되었다. 이규보는 그 발문에서, “예종은 곽여와 같은 사인(詞人)·일사(逸士)와 함께 시부(詩賦)를 지었는데 세간에 전파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니 실로 태평성대의 일이다. 지금 『예종창화집』이란 것이 세상에 유포된 지 오래인데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가 비로소 어떤 사람의 집에서 얻어 읽어보니 당시 군신간의 경사스런 모임을 목격한 것과 같은 생각이 들어 탄식하고 한탄하다 못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마구 흘렀다.”고 감회를 서술하였다.
곽여는 시 뿐만 아니라 경서와 사서, 심지어 도교, 불교, 의약, 음양설에 관한 책까지 섭렵하였으며 한번 보기만 하면 암기하여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활쏘기, 말 타기, 거문고, 바둑 등 못하는 것이 없었다.
1130년(인종 8)에 72세로 생을 마감하자 인종은 죽음을 슬퍼하며 근신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고 진정(眞靜)이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 또 정지상(鄭知常)에게 명하여 산재기(山齋記)를 짓게 하고 이를 비석에 새겨 세우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