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유청은 예종(睿宗) 때 과거에 급제했으나 당시 아직 학문을 이루지 못했다며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한동안 학업을 지속하였다.
그 뒤 그는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으나 인종(仁宗) 초에 이자겸(李資謙)의 간계로 평장사(平章事) 한교여(韓皦如)가 유배될 때 매서(妹婿)인 정극영(鄭克永)과 함께 파직되었다. 그 후 최유청은 이자겸(李資謙)이 몰락한 뒤 내시(內侍)가 되었고, 좌사간(左司諫), 상주수(尙州守), 시어사(侍御史)를 역임하였다.
그는 1132년(인종 10)에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郎)으로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송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최유청은 어사중승(御史中丞), 전중소감(殿中少監)을 거쳐, 1142년(인종 20) 간의대부(諫議大夫)로서 금나라에 가서 책명(冊命)에 감사를 올렸는데, 그의 말과 행동에 금나라 사람들이 탄복했다고 한다.
그 뒤 최유청은 호부시랑(戶部侍郎)에 제수되었고, 동북면병마부사(東北面兵馬副使), 승선(承宣)을 역임하였다. 또한 그는 1144년(인종 22)의 과거에서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지공거(知貢擧) 한유충(韓惟忠)과 함께 진사(進士) 김돈중(金敦中)을 비롯하여 26인을 선발하였다. 1147년(의종 1)에 최유청은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서경(書經)』의 「열명(說命)」 3편을 의종(毅宗)에게 강설하였다. 그해에 어사대부(御史大夫)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가 되었다.
이듬해 그는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판삼사사(判三司事) · 병부상서(兵部尙書)를 거쳐 1149년(의종 3)에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 참지정사(參知政事), 판상서형부사(判尙書刑部事), 이듬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에 올랐다.
1151년(의종 5)에 최유청은 판병부사(判兵部事)를 겸직했으나, 그의 처남인 내시낭중(內侍郎中) 정서(鄭敍)와 왕의 동생인 대령후(大寧侯) 왕경(王暻)이 참소를 입은 사건에 연루되어 남경유수사(南京留守使)로 좌천되었다. 1157년(의종 11)에 대령후 왕경이 천안부(天安府)로 유배될 때 다시 충주목사(忠州牧使), 광주목사(廣州牧使) 등으로 좌천되었다. 의종 대에 그는 정치적 불운이 이어진 셈이다.
1161년(의종 15)에 최유청은 봉원전대학사(奉元殿大學士)가 되었으나, 반대하는 자들이 있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치사(致仕)하였다. 1170년(의종 24)에 일어난 정중부의 난(鄭仲夫의 亂) 때에는 많은 문신들이 피해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러 무인들의 보호로 화를 면하였다. 이는 최유청이 개인적 덕망도 있었지만, 집권한 무신 권력자들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무신 정권기인 명종 대에, 나이가 많음에도 다시 중서시랑평장사로 제수되었고, 1172년(명종 2)에 수사공(守司空)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 판예부사(判禮部事)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최유청은 어려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할 만큼 학문에 대한 애착이 깊었다. 그는 경사자집(經史子集)에 밝았고 불경(佛經)에도 조예가 있었고 『남도집(南都集)』, 『유문사실(柳文事實)』, 『최문숙공집(崔文淑公集)』, 『이한림집주(李翰林集註)』 등 여러 책도 편찬하였다.
최유청의 시호는 문숙(文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