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유청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시대, 중서시랑평장사, 수사공 집현전대학사 판예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직재(直哉)
시호
문숙(文淑)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093년(선종 10)
사망 연도
1174년(명종 4)
본관
창원(昌原)
주요 저서
『남도집』|『유문사실』|『이한림집주』|『최문숙공집』
주요 관직
병부상서|중서시랑평장사
관련 사건
무신정변
내용 요약

최유청은 고려시대에 중서시랑평장사, 수사공 집현전대학사 판예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그는 노년에 이르기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할 만큼 학문에 대한 애착이 깊었다. 의종 대에 병부상서, 참지정사 등을 역임하였는데, 1170년(의종 24) 무신란의 정변에도 불구하고 피해를 입지 않고, 명종 대에도 고위직을 유지하였다. 이는 최유청이 개인적 덕망도 있었으며, 집권 무신 권력자와 맺었던 친분이 작용하였기 때문이었다.

정의
고려시대, 중서시랑평장사, 수사공 집현전대학사 판예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및 인적사항

최유청(崔惟淸)의 본관은 창원(昌原)이며 자(字)는 직재(直哉)이다. 그의 6세조 최준옹(崔俊邕)은 태조를 도운 공신(功臣)이며, 문종(文宗) · 순종(順宗) · 선종(宣宗) 3조(三朝)를 섬긴 주12이고 최유청(崔惟淸)의 아버지는 최석(崔奭, 崔錫)이다. 최유청은 최증(崔証), 최후(崔詡), 최인(崔諲), 최당(崔讜), 최선(崔詵), 최양(崔讓) 등 아들 여덟을 두었고, 그 가운데 네 명은 과거에 급제하고 두 명은 승려가 되었다.

주요 활동

최유청은 예종(睿宗) 때 과거에 급제했으나 당시 아직 학문을 이루지 못했다며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한동안 학업을 지속하였다.

그 뒤 그는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으나 인종(仁宗) 초에 이자겸(李資謙)주13평장사(平章事) 한교여(韓皦如)가 유배될 때 매서(妹婿)인 정극영(鄭克永)과 함께 파직되었다. 그 후 최유청은 이자겸(李資謙)이 몰락한 뒤 내시(內侍)가 되었고, 좌사간(左司諫), 상주수(尙州守), 시어사(侍御史)를 역임하였다.

그는 1132년(인종 10)에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郎)으로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송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최유청은 어사중승(御史中丞), 전중소감(殿中少監)을 거쳐, 1142년(인종 20) 간의대부(諫議大夫)로서 주2에 가서 주1에 감사를 올렸는데, 그의 말과 행동에 금나라 사람들이 탄복했다고 한다.

그 뒤 최유청은 호부시랑(戶部侍郎)에 주3되었고, 동북면병마부사(東北面兵馬副使), 승선(承宣)을 역임하였다. 또한 그는 1144년(인종 22)의 과거에서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지공거(知貢擧) 한유충(韓惟忠)과 함께 진사(進士) 김돈중(金敦中)을 비롯하여 26인을 선발하였다. 1147년(의종 1)에 최유청은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서경(書經)』의 「열명(說命)」 3편을 의종(毅宗)에게 강설하였다. 그해에 어사대부(御史大夫)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가 되었다.

이듬해 그는 주4 주5 · 주6를 거쳐 1149년(의종 3)에 주7 · 참지정사(參知政事), 주8, 이듬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에 올랐다.

1151년(의종 5)에 최유청은 주9를 겸직했으나, 그의 처남인 내시낭중(內侍郎中) 정서(鄭敍)와 왕의 동생인 대령후(大寧侯) 왕경(王暻)이 주10를 입은 사건에 연루되어 남경유수사(南京留守使)로 좌천되었다. 1157년(의종 11)에 대령후 왕경이 천안부(天安府)로 유배될 때 다시 충주목사(忠州牧使), 광주목사(廣州牧使) 등으로 좌천되었다. 의종 대에 그는 정치적 불운이 이어진 셈이다.

1161년(의종 15)에 최유청은 봉원전대학사(奉元殿大學士)가 되었으나, 반대하는 자들이 있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주11하였다. 1170년(의종 24)에 일어난 정중부의 난(鄭仲夫의 亂) 때에는 많은 문신들이 피해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러 무인들의 보호로 주14를 면하였다. 이는 최유청이 개인적 덕망도 있었지만, 집권한 무신 권력자들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무신 정권기인 명종 대에, 나이가 많음에도 다시 중서시랑평장사로 제수되었고, 1172년(명종 2)에 수사공(守司空)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 판예부사(判禮部事)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학문 및 저술

최유청은 어려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할 만큼 학문에 대한 애착이 깊었다. 그는 경사자집(經史子集)에 밝았고 불경(佛經)에도 조예가 있었고 『남도집(南都集)』, 『유문사실(柳文事實)』, 『최문숙공집(崔文淑公集)』, 『이한림집주(李翰林集註)』 등 여러 책도 편찬하였다.

상훈과 추모

최유청의 시호는 문숙(文淑)이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보한집(補閑集)』

단행본

김호동, 『고려 무신정권 시대 문인지식층의 현실 대응』(경인문화사, 2003)
황병성, 『고려 무인정권기 문사 연구』(경인문화사, 2008)
Edward J Shultz 저·김범 옮김, 『무신과 문신: 한국 중세의 무신 정권』(글항아리, 2014)
채웅석, 『고려 중기 정치사의 재조명』(일조각, 2021)

논문

채웅석, 「고려 인종 대 유신정국과 정치 갈등」(『한국사연구』 161, 한국사연구회, 2013)
주석
주1

왕세자, 왕세손, 비빈(妃嬪) 들을 책봉(冊封)하던 임금의 명령. 우리말샘

주2

여진족 완안부의 추장 아구다가 지금의 만주, 몽골, 화베이(華北) 땅에 북송과 요를 무찌르고 1115년에 세운 나라. 1234년 9대 120년 만에 몽고 제국에 망하였다. 우리말샘

주3

추천의 절차를 밟지 않고 임금이 직접 벼슬을 내리던 일. 우리말샘

주4

고려 시대에 둔 추밀원의 종이품 벼슬. 헌종 원년(1095)에 지중추원사를 고친 것으로, 충렬왕 원년(1275)에 지밀직사사로 고쳤다. 우리말샘

주5

고려 시대에 둔, 삼사(三司)의 으뜸 벼슬. 품계는 종일품으로 재신(宰臣)이 겸하였다. 우리말샘

주6

고려 시대에 둔 병부(兵部)의 으뜸 벼슬. 품계는 정삼품으로 문종 때 설치하여 충렬왕 원년(1275)에 군부판서로 고쳤으며, 뒤에도 몇 차례 환원과 개칭을 거듭하였다. 우리말샘

주7

고려 시대에, 중서문하성에 속한 종이품 벼슬. 문종 때 정하였으며 뒤에 지첨의부사로 고쳤다가 다시 지도첨의사, 지문하부사 등으로 고쳤다. 우리말샘

주8

고려 시대에 둔, 상서형부의 으뜸 벼슬. 재신(宰臣)이 겸하였다. 우리말샘

주9

고려 시대에 둔, 상서병부의 으뜸 벼슬. 재신(宰臣)이 겸하였다. 우리말샘

주10

남을 헐뜯어서 죄가 있는 것처럼 꾸며 윗사람에게 고하여 바침. 우리말샘

주11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 우리말샘

주12

중요한 관직에 있는 신하. 우리말샘

주13

간사한 꾀. 우리말샘

주14

모든 재앙과 액화.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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