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당설총관인귀서」의 문장이 단련된 솜씨로 보아 당시 표전주의(表箋奏議)를 도맡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신라의 문장가 강수(强首)의 작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한 것을 알 수는 없다. 당시의 사정을 보면, 67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에 당나라가 삼국 전체의 영토를 그들의 지배하에 두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옛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해 대당투쟁(對唐鬪爭)을 전개하게 된다.
신라는 고구려 보장왕의 서자 안승(安勝)을 옛 백제 땅인 금마저(金馬渚)로 맞아들여 당나라와 결탁한 왕자 부여융(扶餘隆)과 백제군에 대항하게 하였다. 백제군이 웅거한 성을 함락하고 석성전투(石城戰鬪)에서 당군 3,500여 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당나라의 행군총관인 설인귀는 당나라 고종의 칙명을 받들어 신라의 불충(不忠)과 배은(背恩)을 질책하고 신라를 치겠다는 서신을 보내기에 이르렀다. 문무왕은 「답당설총관인귀서」를 보내어 신라가 여제정벌(麗濟征伐) 과정에서 세운 공적을 서술하고 당군의 신라 정벌이 정당하지 않음을 조리있게 논술하였다.
「답당설총관인귀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라는 당나라의 은의를 입고 여제정벌에 진충갈력(盡忠竭力)하였으며 국내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여제부흥운동 세력에게 곤욕을 당한 당군을 구원하였던 사실을 친절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전쟁과정에서 부득이하여 당나라의 명령을 이행하지 못하게 된 사정을 간곡하게 변명하고 있다. 당나라가 오히려 ‘신라가 배반하였다.’고 한 백제의 말만을 믿고 신라를 치려함은 온당한 처사가 아니니 행군총관 설인귀가 전후사정을 헤아려 당나라 황제에게 알려서 신라정벌을 중지시켜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