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주(廣州). 초명은 원령(元齡). 자는 호연(浩然), 호는 둔촌(遁村). 광주 향리 이당(李唐)의 아들이다.
충목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문장을 잘 짓고 지조가 굳기로 명성이 높았다.
1368년(공민왕 17) 신돈(辛旽)의 미움을 사 생명의 위협을 받자, 가족과 함께 영천으로 도피하여 고생 끝에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1371년 신돈이 주살되자 개경으로 돌아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여주 천녕현(川寧縣)에서 전야(田野)에 묻혀 살면서 시를 지으며 일생을 마쳤다.
그의 시에는 꾸밈과 우회보다는 직서체(直敍體)에 의한 자연스럽고 평이한 작품이 많다. 그는 당시 임심문(任深文)을 비롯한 60명에 달하는 많은 인물들과 시로써 교유하였다. 특히,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과의 친분이 두터웠다.
문집 부록에 실린 삼은(三隱)의 기(記)·서(序)·서(書)는 그와 삼은과의 관계를 잘 알 수 있게 하여준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그가 조선조에 벼슬을 지냈다고 잘못 기록되어 있는데, 1611년(광해군 3) 8대손인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의 주청이 받아들여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바로잡혀지게 되었다. 광주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둔촌유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