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측 ()

불교
인물
삼국시대 신라의 『성유식론소』, 『인왕경소』, 『반야심경찬』 등을 저술한 승려.
이칭
이칭
문아(文雅)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613년
사망 연도
6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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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삼국시대 신라의 『성유식론소』, 『인왕경소』, 『반야심경찬』 등을 저술한 승려.
개설

휘(諱)는 문아(文雅), 자(字)는 원측이다. 신라의 왕손(王孫)이라고 전해진다.

생애

3세에 출가하여 15세에 당나라로 가서 유식학(唯識學) 연구의 개척자인 법상(法常)과 승변(僧辨)으로부터 유식학을 배웠다. 특히, 어학에 천부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어서 중국어뿐만 아니라 범어에도 능통하였다. 당나라 태종(太宗)은 원측에게 친히 도첩(度牒)을 내리고 원법사(元法寺)에 머무르도록 하였다. 그곳에서 비담(毘曇)·성실(誠實)·구사(俱舍) 등 유식학 연구의 기본이 되는 소승경론(小乘經論)을 연구하는 한편, 대승경론도 폭넓게 연구하였다.

이 무렵 인도에서 오랫동안 유식학을 연구하였던 현장(玄奘)이 귀국하였는데, 현장의 제자 규기(窺基)와 그는 유식학에 있어 대립적 견해를 보였으므로 규기 등에게 부당한 시기를 받았다. 그 뒤 서명사(西明寺)로 거처를 옮겨 방대한 저술을 통하여 중국불교학계에 명성을 떨쳤다.

활동사항

676년 인도의 고승 지바하라(地婆訶羅)가 인도의 여러 불경들을 가지고 와서 중국어로 번역하기를 당 고종에게 청하였을 때 원측은 박진(薄塵)·영변(靈辨)·가상(嘉尙) 등과 함께 『대승밀엄경(大乘密嚴經)』등 18부 34권을 번역하였다. 『대승현식경(大乘顯識經)』을 번역할 무렵 고증자(考證者)로서 번역하는 무리의 우두머리를 맡기도 하였다. 그 뒤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에 암자를 짓고 8년 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않은 채 선정(禪定)을 닦았으며, 만년에 다시 번역사업에 종사하였다.

693년 인도 승 보리유지(菩提流志)가 가져온 범본 『보우경(寶雨經)』을 번역하였고, 695년 실차난타(實叉難陀)가 우전국(于闐國)으로부터 와서 『화엄경』을 번역할 때도 번역사업에 참여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불수기사(佛授記寺)에서 입적하였다.

제자들이 다비를 마치고 사리 49과를 얻어 용문산(龍門山) 향산사(香山寺)에 안치하였으나, 그 후 제자 자선(慈善)과 승장(勝莊) 등이 사리를 나누어서 종남산 풍덕사(豊德寺)에 사리탑을 세웠다. 다시 1114년(예종 9)에는 용홍사 인왕원에 거주하던 광월법사가 발원하여 서안부 함녕현(西安府咸寧縣) 번천(樊川) 흥교사(興敎寺)에 있는 현장법사 탑 좌측에 탑을 세우고 사리를 옮겨 모셨다.

현장에서 비롯된 중국의 법상종은 그의 제자 규기 때에 이르러 종파로서 확립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원측은 구유식과 신유식을 섭렵하였기 때문에 호법(護法)의 입장을 중시하는 규기 중심의 자은학파(慈恩學派) 사상과는 대립하는 측면이 있었다. 따라서 원측을 이단시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송고승전(宋高僧傳)』에 전해지는 원측의 도청설(盜聽說)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송고승전(宋高僧傳)』에 의하면 『성유식론』을 번역할 때 현장은 규기와 그 밖의 몇몇 제자들에게 윤색(潤色)·집필·검문(檢文)·편찬 등의 일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규기가 『성유식론』 강의를 듣고 있을 때 원측이 문지기에게 돈을 주고 몰래 마루 밑에 들어와 듣고 규기보다 먼저 서명사에서 『성유식론』을 강의하였다고 한다. 규기는 자기보다 먼저 원측이 강의한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고, 현장은 원측 모르게 규기에게 『인명론(因明論)』을 강의하여 규기는 이것에 대한 해의(解義)를 써서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또 『송고승전』의 저자는 계속해서 원측이 측천무후(則天武后)로부터 살아있는 부처와 같은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측천무후의 후대를 받아 역경관(譯經館)에 머무르면서 『대승현식경』등을 번역하였고 유식의 주석서와 기타 경론의 자세한 해설을 하여 천하에 유포시켰다고 한다.

원측은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10권을 비롯하여 『성유식론소(成唯識論疏)』10권, 『주별장(周別章)』3권, 『유식이십론소(唯識二十論疏)』2권, 『관소연연론소(觀所緣緣論疏)』2권, 『인명정리문론본소(因明正理門論本疏)』2권 등 유식계통 문헌에 대하여 많은 주석서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반야 계통의 문헌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 『반야심경찬(般若心經贊)』1권과 『인왕경소(仁王經疏)』3권 등을 남겼다. 이는 원측의 학문적 깊이와 넓이가 다른 법상종 학승(學僧)에 비하여 일층 진보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원측의 유식사상은 신·구유식을 화쟁적으로 융합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구유식사상을 많이 받아들였지만, 진제(眞諦)의 9식설(識說)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신유식의 8식설을 받아들였으며, 규기 계통의 법상종에서 강조하던 오성각별설(五性各別說)을 비판하고 모든 중생이 성불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아울러 당시 논란의 중심이었던 공유쟁론(空宥諍論)에 대해서도 어느 한 쪽에 치우친 입장이 아니라 둘을 화쟁적 입장에서 받아들이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원측의 유식사상은 서명사를 중심으로 하나의 계파를 이루어 계승되었고, 그의 제자 도증(道證)은 692년(효소왕 1)에 신라에 귀국하여 원측의 유식학을 신라에 전했다. 원측의 사상은 태현(太賢)에게 계승되어 해동 법상종 성립의 토대를 제공하였다.

상훈과 추모

현재 중국 서안의 흥교사에 원측의 탑묘(塔廟)가 모셔져 있으며 그 안에 초상과 후대에 송복(宋復)이 지은 대주서명사고대덕원측법사불사리탑명(大周西明寺故大德圓測法師佛舍利塔銘)이 남아있다.

참고문헌

『삼국유사(三國遺事)』
『송고승전(宋高僧傳)』
『현장삼장사자전총서(玄奘三藏師資傳叢書)』
『한국유식사상사』(이만, 장경각, 2000)
『원측의 반야심경찬연구』(정병조, 한국학보, 일지사, 1976)
『원측(圓測)』(조명기, 한국의 인간상 3, 신구문화사, 1965)
『원측(圓測)의 사상(思想)』(조명기, 진단학보 16, 진단학회, 1949)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이능화, 신문관, 1918)
「원측(圓測)의 생애와 유식사상(唯識思想) 연구」(남무희, 국민대학교박사학위논문, 2005)
「원측(圓測)의 유식철학(唯識哲學) : 신·구 유식의 비판적 종합」(정영근, 서울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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