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측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고번경증의대덕원측화상휘일문(故飜經證義大德圓測和尙諱日文, 이하 『휘일문』)』, 『대주서명사고대덕원측법사사리탑명병서(大周西明寺故大德圓測法師舍利塔銘并序, 이하 『탑명』)』, 『송고승전(宋高僧傳)』,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술되어 있다. 이 중 『휘일문』과 『탑명』이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탑명』에 따르면, 원측은 만세통천(萬歲通天) 원년인 696년에 84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역산하면 원측의 생년은 613년이 된다.
원측의 출신에 대한 정보는 각각의 자료에서 조금씩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송고승전』 「원측전」은 그의 성씨와 조적(祖籍)에 관해 미상이라고 하였으나, 『탑명』에서는 원측의 이름이 문아(文雅)였고, 신라 국왕의 후손이라고 기록하였다. 『삼국유사』에는 원측이 해동의 고덕(髙徳)이었지만, 모량리(牟梁里) 사람이었기 때문에 승직을 주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휘일문』에는 원측의 출신을 유추할 수 있는 두 구절이 있다. 즉, “풍향의 사족, 연나라의 왕손”이라는 구절과 “해동의 어린 용, 계림의 어린 봉”으로 그를 칭한 구절이다. 이를 두고 북연(北燕, 407~436)의 왕족인 풍씨(馮氏)가 원측의 조상으로, 북연이 멸망할 즈음 고구려를 거쳐 신라로 귀순하였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주1
원측이 신라 태생이며, 그의 신분이 왕손 혹은 높은 혈통이었을 것이란 견해에 특별한 이견은 없다.
『탑명』에서는 3세 때인 615년에 출가하였다고 하며, 『휘일문』에서는 강보(襁褓)에 싸인 채 출가하였다고 한다. 이후 15세 되던 해인 627년에 당으로 유학을 떠났으며, 장안(長安)에서 법상(法常, 567645)과 승변(僧辯, 568642)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휘일문』과 『탑명』에는 원측이 당 태종(재위 626~649) 때 도첩을 수여받아 승려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당육전(唐六典)』 제4권 「상서예부(尙書禮部)」에 따르면, 당시 3년마다 승적을 새로 고쳐 사부(祠部), 홍려시(鴻臚寺), 주부(州府)에 각각 한 부씩 비치하였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원측은 18세(630) 혹은 21세(633) 전후에 태종으로부터 도첩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탑명』에 따르면 원측이 도첩을 받은 뒤 원법사(元法寺)에 머물렀다고 하는데, 이곳은 법상이 주석한 보광사와 승변이 거주한 흥복사 근처에 있었다. 이 무렵 원측은 범어(梵語)를 포함한 어학과 『비담론(毘曇論)』, 『성실론(誠實論)』, 『구사론(俱舍論)』, 『바사론(婆沙論)』 등의 논서 및 고금의 주석서를 공부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명성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원측의 견해는 645년 현장(玄奘)이 인도에서 귀국한 후 더욱 넓어진다. 현장이 전한 각 부파의 삼장과 대승경론은 원측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과 『성유식론(成唯識論)』이 대표적이다. 『탑명』에 따르면, 원측은 현장을 만나자 전생에 만난 것과 같이 서로 뜻이 맞아 거스르는 일이 없었고, 현장이 번역한 경론을 마치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있던 것 같았다고 한다.
원측은 658년인 현경(顯慶) 3년에 대덕 50인 중 한 명으로 초빙되어 서명사(西明寺)에 거주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측천무후에게 신뢰를 얻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서명사는 656년 8월에 측천무후의 병약한 아들 이홍(李弘)을 위해 지은 사찰이다.
나당전쟁이 시작한 해인 671년에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에 들어갔는데, 『탑명』에는 그가 산수를 좋아해서 운제사와 인근의 모처에서 8년간 수행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원측은 679년 종남산에서 하산하여 장안으로 돌아왔다. 아직 고종이 재위하고 있던 시기였지만, 노쇠한 그를 대신하여 측천무후가 실질적 권력을 장악한 때였다. 『탑명』에 따르면, 원측은 서명사로 돌아와 『성유식론』을 강연하였고, 칙명에 의해 중천축(中天竺)에서 온 삼장법사 지바가라(地婆訶羅, Skt.Divākara, 613~687)와 함께 『대승밀엄경(大乘密嚴經)』을 번역하였다.
『휘일문』에는 측천무후가 원측을 부처님 대하듯 하였고, 인도에서 온 승려들을 만날 때마다 그를 불러 토론하게 하여서 명성이 자자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송고승전』 「원측전」에서는 고종 말, 측천무후 초에 원측이 역경관(譯經館)에 들어가 『대승현식경(大乘顯識經)』 등의 경전을 번역하며 증의(證義)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이러한 원측의 명성은 신라에도 전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휘일문』에 따르면, 신문왕은 수공(垂拱) 연간(685~688)에 표문을 올려 원측의 환국을 요청하였으나, 측천무후가 거절하였다.
원측은 제운반야(提雲般若, Skt.Devaprajña)가 뤄양[洛陽]에 도착한 688년 무렵에 뤄양의 대주동사(大周東寺)로 이주한 것으로 보이며, 이 무렵부터 『화엄경』을 강연하고 번역하였다. 『탑명』에 따르면, 이 강역이 끝나기 전인 696년 7월 22일에 불수기사(佛授記寺)에서 84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용문(龍門)의 향산사(香山寺) 골짜기에서 화장하고 백탑(白塔)을 세웠고, 화장한 유해의 일부는 그가 은거했던 종남산 풍덕사(豊德寺)에 따로 안장하였다고 한다. 이후 1114년(예종 9)에는 광월법사가 발원하여 서안부(西安府) 함녕현(咸寧縣) 번천(樊川) 흥교사(興敎寺)에 있는 현장법사 탑 좌측에 탑을 세우고 사리를 옮겨 모셨다.
한편, 『삼국사기』에 따르면 원측이 입멸하기 전인 692년에 제자 도증(道證)이 신라로 귀국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신라에 현장과 원측의 유식사상이 크게 전하여졌던 것으로 보인다.
원측은 그간 규기(窺基, 주2의 자은학파(慈恩學派)와 대립하는 소위 서명학파(西明學派)를 대표하는 학승으로 알려져 왔다. 원측이 모든 중생에게 불성(佛性)이 있다고 보는 진제(眞諦, Skt.Paramārtha, 499569)의 일체개성설(一切皆性說)의 입장에 서 있었으며, 성불할 수 없는 중생도 있다고 보는 현장의 오성각별설(五性各別說)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원측을 오성각별론자로 분류하는 새로운 시각들이 제시되고 있다. 다만, 원측이 현장의 신유식(新唯識)을 중심으로 진제의 구유식(舊唯識)의 주장을 다수 받아들였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원측은 신유식의 8식설을 받아들여 진제의 9식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현장의 신유식의 교학 틀에서 진제의 사유를 포용하는 경향이 강하다.
현존 저술로 『무량의경소(無量義經疏)』, 『불설반야바라밀다심경찬(佛說般若波羅蜜多心經賛)』, 『인왕경소(仁王經疏)』,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 『성유식론소』 단간(斷簡) 등이 있다. 이 중 현장 역 『해심밀경』에 대한 소는 신라 승려 원효(元曉), 경흥(憬興)도 저술하였으나, 내용의 대부분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원측의 주3 원측의 『해심밀경소』는 티베트까지 전파되어 그들의 불교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