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덕여왕은 삼국시대 신라의 제28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647~654년이며, 신라시대 3인의 여왕 중 한 사람으로, 선덕여왕의 유언에 따라 즉위했다. 즉위하면서 비담의 난을 진압했고,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이 빈번해지자 김유신을 중심으로 방어하는 한편, 김춘추를 당나라에 보내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신라 문제에 소극적이던 당나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허락받고 긴밀한 외교관계를 구축했다. 의관을 중국식으로 바꿨고 연호도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는 등 한화정책을 폈으며, 집사부 설치, 행정관부의 체계화로 중앙집권적 귀족관료체계를 완성했다.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승만(勝曼)이다. 신라시대 3인의 여왕 중 한 사람으로서 선덕여왕(善德女王)의 유언에 의해 즉위하였다. 진평왕(眞平王)의 친아우[同母弟]인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의 딸이며, 어머니는 월명부인(月明夫人) 박씨(朴氏)이다. 진덕여왕(眞德女王)은 자질이 충만하고 아름다웠으며 무척 총명했다고 한다.
즉위하던 해(647)에 선덕여왕 말년에 반란을 일으켰던 비담(毗曇)을 비롯한 30인을 붙잡아 처형하고, 알천(閼川)을 상대등(上大等)에 임명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꾀하였다. 그리고 사신을 파견해 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지속시켰는데, 이것은 당나라의 힘을 빌려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고구려와 백제는 진덕여왕이 즉위하면서부터 계속적으로 신라를 침공해왔다. 이에 신라는 압독주(押督州: 지금의 경상북도 慶山) 군주(軍主)이던 김유신(金庾信)을 중심으로 백제의 공격을 막는 한편 648년(진덕여왕 2)에는 김춘추(金春秋)를 당나라에 보냈다. 이로써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는 청병외교(請兵外交)와 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는 숙위외교(宿衛外交)를 전개하였다.
또한 김춘추가 당나라에서 외교활동을 벌인 결과, 신라는 지금까지 신라 문제에 대해 소극적이던 당나라 태종(太宗)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허락받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김춘추 일파의 주도 아래 당나라의 정치제도와 문화를 모방한 대규모 정치개혁이 단행되었다. 이것을 이른바 한화정책(漢化政策)이라고 한다.
먼저, 649년 의관을 중국식으로 하는 중조의관제(中朝衣冠制)를 실시하였다. 650년에는 즉위 직후부터 사용하던 독자적 연호인 태화(太和)를 버리고 당나라 고종(高宗)의 연호였던 영휘(永徽)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중국의 관제(官制)와 연호(年號)의 사용은 김춘추의 건의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당나라의 선진문물을 수용한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당나라에 대한 신라의 정치적 예속도가 강화되었다는 부정적인 면도 무시할 수 없다.
651년에 백관(百官) 왕에 대해 행하는 정조하례제(正朝賀禮制)를 실시하였다. 또, 종래의 품주(稟主)를 개편(稟主)하여 국왕직속의 최고 관부로서 집사부(執事部)를 설치하고, 품주의 본래 기능은 신설된 창부(倉部)로 이관하였다. 파진찬(波珍湌) 죽지(竹旨)를 승진시켜 집사부의 수장 중시(中侍)로 삼고 기밀사무를 맡겼다. 이는 토착기반을 가진 귀족들의 정서를 인지하거나 주변국의 사정을 파악하지 못했던 선덕여왕대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상대등으로 대표되는 귀족세력을 배제하고 김춘추를 포함한 여왕지지세력의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하려는 정치개혁이었다. 또, 시위부(侍衛府)를 개편했는데, 왕권강화를 목적으로 김유신의 군사력이 주축이 되어 개편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이렇듯 진덕여왕은 왕권안정을 위한 집사부 설치, 율령체제를 운영하는 좌이방부(左理方府)의 신설, 각 행정관부의 체계화 등 개혁을 통해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적 귀족관료체제를 지향했다. 그렇지만 진덕여왕대 김춘추에 의하여 주도된 내정개혁의 방향은 진덕여왕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김춘추 자신이 훗날 즉위할 경우에 대비한 정치 작업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진덕여왕은 654년 재위한 지 8년 만에 죽었다. 1982년 중국 시안 근교 당나라 태종(太宗, 재위: 626∼649)의 무덤인 소릉(昭陵) 주변에서 14국군장석상(十四國君長石像) 중 하나였던 진덕여왕 석상으로 추정되는 석상 하반신 일부가 출토되었다. 14국군장석상은 태종 시기에 국가와의 침탈 전쟁, 영토 확장, 외교 관계에서 이룩해놓은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돌궐(突厥) · 토번(吐蕃) · 구자(龜玆) · 고창(高昌) · 신라 등 14국의 외국 수장들의 형상을 담은 석상을 만들어 소릉 아래 세운 것이다. 바로 여기에 신라 진덕여왕상이 포함되어 있었다.
송 유사웅(游師雄)의 「당태종소릉도(唐太宗昭陵圖)」, 송 조명성(趙明誠)의 「금석록(金石錄)」, 송 송민구(宋敏求)의 「장안지(長安志)」등에는 소릉에 도열한 14국번군장상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석상 좌대에 ‘신라낙랑군왕김진덕(新羅樂浪郡王金眞德)’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고 적고 있다. ‘낙랑군왕’은 진평왕 47년(武德 7년, 624)에 당나라로부터 받은 관함으로 선덕여왕 · 진덕여왕 때 들어와서도 이 관함을 계속 승계 받았다. 석상의 하반신 상은 좌우로 쪼개진 채 출토되었는데, 세 겹짜리 장포(도포)를 발끝까지 두른 차림을 하고 있다. 특히 배부터 아래 다리부분까지 길게 늘어뜨린 3겹 장식이 보인다.
2002년 섬서성고고연구소(西省考古硏究所)와 소릉박물관(昭陵博物館) 발굴조사팀은 석상이 발견된 부근에서 ‘신라…군(新羅…郡)’, ‘덕(德)’ 등의 명문이 새겨진 진덕여왕 석상 좌대(座臺) 잔편(殘片)을 발견하여 1982년에 발굴한 석상을 진덕여왕상의 하반신 일부로 추정하고 있다. 그 근거는 석상 주인공의 성비 구분과 잔존 석상의 복식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14국의 군주들 가운데 여성은 진덕여왕이 유일하다. 남성 군주석상의 복식 형태는 전반적으로 단출하고 투박한 느낌을 주는 반면에 진덕여왕석상의 복식 형태는 전반적으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느낌을 준다. 현존 유물과 문헌 자료에 의하면 진덕여왕 석상일 가능성은 높은 편이다. 하지만 석물 형상이 온전하거나 온전한 것에 가까운 석상은 서너 기(基)에 불과하고, 나머지 개체는 모두 크기가 조그마한 형태의 잔석이고 또, 이들 잔석 중 어느 것이 어느 군주상에서 나왔는지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여기에 대한 보완 작업과 정밀한 연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