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성에서 국왕을 시위한 군대이다. 처음 조직된 것은 624년(진평왕 46)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651년(진덕여왕 5)에 3도(徒)로 나누어 편성되었다. 전제왕권을 뒷받침해주는 관부로서 설치된 집사부와 동시에 3도의 편제로 이루어졌다.
이는 결국 군사적인 면에서 전제왕권을 뒷받침해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685년(신문왕 5)에 종전의 감(監)을 폐지하고 장군을 두는 조처를 취하였다. 장군은 6인으로 관등은 급찬(級飡)에서부터 아찬(阿飡)까지 임명하였다.
대감도 6인을 두었는데 나마(奈麻)로부터 아찬에 이르기까지 임명하였고, 대두(隊頭)는 15인으로 관등은 사지(舍知)로부터 사찬(沙飡)에 이르기까지 임명하였다. 항(項)은 36인을 두었는데, 관등은 사지로부터 대나마(大奈麻)에 이르기까지이다.
졸(卒)은 117인으로 선저지(先沮知)로부터 대사(大舍)까지 임명하였다. 신문왕이 시위부에 장군 6인을 두는 조처를 취한 것은 김흠돌(金欽突)의 반란사건을 계기로 귀족들의 위협으로부터 전제왕권을 보호하는 시위부대를 강화하고, 그 격을 높이려는 뜻을 지닌 것이다.
비록 소속된 군인의 수는 장군 이하 졸까지 합하여 180인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중요성은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