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직은 총관(摠管)이었다. 661년(문무왕 1) 6월 당나라에서 숙위하던 왕의 아우 김인문(金仁問)과 유돈(儒敦) 등이 돌아와 왕에게 말하기를 “당나라가 이미 소정방(蘇定方)을 파견하여 수륙양병(水陸兩兵)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하게 하였으니 신라도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 군대와 함께 고구려를 치자.”고 하였다.
이에 김유신(金庾信)을 대장군으로, 김인문 · 진주(眞珠) · 흠돌(欽突)을 대당장군(大幢將軍)으로, 천존(天存) · 죽지(竹旨) · 천품(天品)을 귀당총관(貴幢摠管)으로, 품일(品日) · 충상(忠常) · 의복(義服)을 상주총관(上州摠管)으로, 진흠(眞欽) · 중신(衆臣) · 자간(自簡)을 하주총관(下州摠管)으로, 고순 · 수세(藪世)를 남천주총관(南川州摠管)으로, 술실(述實) · 달관(達官) · 문영(文穎)을 수약주총관(首若州摠管)으로, 문훈(文訓) · 진순(眞純)을 하서주총관(河西州摠管)으로, 진복(眞福)을 서당총관(誓幢摠管)으로, 의광을(義光)을 낭당총관(郞幢摠管)으로, 위지를(慰知)를 계금대감으로 삼았다. 9월 25일에 문무왕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옹산성(甕山城)을 에워쌓고, 27일에 대책(大柵)을 태운 다음, 수천명을 참살하고 항복을 받았다. 이때 문무왕은 공을 세운 고순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에게 칼과 창을 상으로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