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星湖)는 이익의 호이며, 사설은 ‘세쇄(細碎: 매우 가늘고 작음)한 논설’이라는 뜻으로 이는 저자가 겸사로 붙인 서명이다.
저자가 40세 전후부터 책을 읽다가 느낀 점이 있거나 흥미있는 사실이 있으면 그때 그때 기록해 둔 것들을 그의 나이 80에 이르렀을 때에 집안 조카들이 정리한 책이다.
여기에는 제자들의 질문에 답변한 내용을 기록해 둔 것도 포함되었다. 이를 그의 제자 안정복(安鼎福)이 다시 정리한 것이 『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類選)』이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필사본이 있었으나 인쇄되지 못하다가 1915년 조선고서간행회에서 안정복의 정리본인 『성호사설유선』을 상·하 2책으로 인쇄하였다(조선군서대계속 제19·20집).
이 책을 다시 1929년에는 문광서림(文光書林)에서 정인보(鄭寅普)가 교열해 선장본(5책)과 양장본(상·하 2책)으로 동시에 출판했는데, 이 대본도 『성호사설유선』이었다. 문광서림본에는 저자의 자서, 변영만(卞榮晩)의 서문과 정인보의 서문이 더 붙여졌다. 그리고 부록으로 『곽우록(藿憂錄)』이 추가되었다.
그 뒤 1967년에 이익의 조카 병휴(秉休)의 후손인 돈형(暾衡)이 소장한 30책 원본의 『성호사설』을 경희출판사(慶熙出版社)에서 상·하 2책으로 영인, 출판함으로써 학계에 널리 보급되었다.
조선시대의 필사본으로는 국립중앙도서관본·재산루(在山樓)소장본·규장각본, 일본의 도요문고본·와세다대학소장본 등이 있다.
이 중 국립중앙도서관본은 내용의 일부가 다른 본과 약간 다르며, 일부만이 전하는 영본인데 국립중앙도서관측의 해제에 의하면 이를 이익 자신의 자필 원고로 추정하고 있다.
번역본에는 이익성(李翼成)이 부분적으로 번역한 『성호사설』(한국사상대전집 제24권, 동화출판공사, 1977)이 있다. 이 번역본은 삼성출판사에서 『성호사설』로 재출판되었다(1981). 전문을 번역한 『국역성호사설』(11권, 민족문화추진회, 1977∼1979)이 간행되었다.
『성호사설』은 천지문(天地門)·만물문(萬物門)·인사문(人事門)·경사문(經史門)·시문문(詩文門)의 다섯 가지 문(門)으로 크게 분류해 총 3,007편의 항목에 관한 글이 실려 있다. 그러나 분류가 엄정하게 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저자가 생존시에 그의 제자 안정복이 이의 재분류와 정리를 자청해 『성호사설유선』을 편찬하였다. 여기에는 중복되는 것은 합치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은 빼서 총 1,332편의 글을 수록하였다. 이에서는 ‘문’을 ‘편’으로 바꾸고 ‘편’ 아래의 구분으로 문을 설정했으며, 만물문을 경사문 다음에 두었다.
『성호사설』의 천지문에는 223항목의 글이 실려 있다. 이는 천문과 지리에 관한 서술로서 해와 달, 별들, 바람과 비, 이슬과 서리, 조수, 역법과 산맥 및 옛 국가의 강역에 관한 글 들이다. 만물문에는 생활에 직접·간접으로 관련이 있는 368항목에 대한 서술로서 복식·음식·농상·가축·화초·화폐와 도량형·병기와 서양 기기 등에 관한 것들이 실려 있다.
인사문에는 정치와 제도, 사회와 경제, 학문과 사상, 인물과 사건 등을 서술한 990항목의 글이 실려 있다. 그 예를 들면, 비변사를 폐지하고 정무를 의정부로 돌려야 한다는 설, 서얼 차별 제도의 폐지, 과거 제도의 문제점과 개선안, 지방 통치 제도의 개혁안, 토지 소유의 제한, 고리대의 근원인 화폐 제도의 폐지, 환곡 제도의 폐지와 상평창 제도의 부활, 노비 제도의 개혁안, 불교·도교·귀신 사상에 대한 견해, 음악에 대한 논의, 혼인·상제에 대한 습속의 비판 등이다.
경사문에는 육경사서(六經四書)와 중국·우리 나라의 역사서를 읽으면서 잘못 해석된 구체적인 내용과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실은 논설, 그리고 역사 사실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붙인 1,048항목의 글이 실려 있다.
특히 이에는 역사에서 정치적 사건에 도덕적 평가를 앞세우는 것을 비판하고 당시의 시세 파악이 중요함을 주장하였다. 또한 신화의 기술은 믿을 수 없다고 하여 역사서술에서 이의 배제를 논해 그의 역사학적 방법론과 역사관이 반영되어 있다.
마지막의 시문문에는 시와 문장에 대한 평으로서 378항목의 글이 실려 있다. 여기에서는 중국 문인과 우리 나라의 역대 문인의 시문(詩文)이 비평되어 있다.
이 책은 기록을 내용별로 구분해 싣는 유서학(類書學)의 저술 또는 백과전서적인 책으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선례는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지봉유설』이 서양에 대한 기록이나 광범위한 분야를 다룬 점에서는 『성호사설』과 유사성이 있다. 그러나 현실의 개혁의식에 있어서는 『성호사설』이 훨씬 강렬한 편이다.
이 책은 서양의 새로운 지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으며, 사물과 당시의 세태 및 학문의 태도에 대해 개방적인 자세로 파악하고 있다.
그는 학문을 현실에 이용하려는 관점을 가지고 있으며, 묵수적인 태도가 아니라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 또한 우리 나라의 국토와 국민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살피는 자아의식이 뚜렷한 점 등에서 실학적인 저술이라 할 것이다.
이 책에 씌어진 모든 항목의 서술에 그의 뚜렷한 의식이 반영된 것은 아니나 현실문제를 다룬 항목에 있어서는 그의 사상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 중 중요한 몇 가지 특징적인 것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지구가 둥글고 달보다 크며 해보다 작다는 인식, 서양의 기술이 대단히 정교하다는 인식, 지도작성에 정간목법(井間目法)을 쓰면 정확하게 그릴 수 있다는 인식, 단군과 기자조선의 강역이 요서지방에까지 미쳤다는 주장, 과거제도에 국사(國史)를 시험보도록 하자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이 밖에 학문에서 문학보다 실용적인 현실 구제책이 중요하다는 것, 당시 유교 이외의 다른 사상의 의미를 인정한 점, 생존이 어려운 하층민의 생활 보장을 적극 주장한 점, 붕당의 원인에 대한 현실적인 분석 등도 그 한 예라 할 수 있다.
저자가 조선시대의 실무를 잘 아는 사람으로 이이(李珥)와 유형원(柳馨遠)을 들었는바, 그는 유형원의 학문 태도를 계승해 차원을 한 단계 더 넓고 깊게 발전시켰다. 이후의 안정복·정약용(丁若鏞)·이중환(李重煥)·박제가(朴齊家)·박지원(朴趾源)의 학문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성호사설』에 담긴 사상은 하나의 호수에 비겨 말하기도 한다. 즉 유형원 이래 발전되어 온 실학이 그의 저술에 이르러 모두 통합되었다가 그 뒤 각 분야의 전문학자에 의해 더욱 분화되어 심층적으로 연구된 것을 뜻한다.
『성호사설』은 이익의 사회개혁안인 『곽우록』의 내용과 깊은 관련을 가진다. 『성호사설』에 담긴 내용을 현실개혁안 중심으로 다시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 『곽우록』이다. 그러므로 이익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에는 『성호사설』이 『곽우록』보다 더 중요한 기본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