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기(東廂記)」는 조선 후기 이옥(李鈺)이 지은 희곡(戲曲)이다. 일명 ‘사혼기(賜婚記)’라고도 하며 한문으로 작성되었다. 중국 「서상기(西廂記)」의 상대칭으로 「동상기」라 한 것이다. 「동상기」는 가난한 백성에게 덕화(德化)를 베푼 임금을 찬양한다는 주제 아래, 오락적 요소가 가미된 텍스트이며, 희곡을 모방했지만 공연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정조가 김·신 부부의 혼인을 이덕무(李德懋)에게 기록하게 한 것이 「김신부부전(金申夫婦傳)」이라면, 민간에서 이 혼인에 주목하여 이옥이 희곡으로 기록한 것이 「동상기」이다.
「동상기(東廂記)」는 일명 ‘사혼기(賜婚記)’라고도 하며 한문으로 작성되었다. 「동상기」라는 제목은 중국 「서상기(西廂記)」의 상대칭이다. 희곡 형식이지만 공연을 위한 것이 아니고 「서상기」 형식을 모방한 일종의 유희 문학이다.
이옥(李鈺)은 1791년(정조 15) 6월, 과거 공부를 하던 중 긴 장마에 나가지 못하고 힘들어 할 때 시전(市廛)에서 돌아온 하인이 들려준 김 · 신 부부의 혼인 이야기를 듣고 희곡(戲曲) 형식의 「동상기」를 저술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791년(정조 15) 2월 산천에는 새싹이 움트고 꽃봉오리가 맺힐 무렵, 정조(正祖)는 한양성(漢陽城) 안의 일반 백성 가운데 혼인 적령기에 달한 자녀가 있어도 집안이 가난하여 혼인시키지 못하는 것을 가엾게 여겨, 국명으로 연회(宴會)의 보조비로 금 500냥, 포 2단(段)씩을 하사하여 혼인을 권장하였다. 이때 150인을 인연을 맺어 주었는데, 김 도령(金道令)과 신 소저(申小姐)만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말미암아 이 좋은 특전을 받지 못하였다. 정조는 두 청춘 남녀의 딱한 사정을 알고 다시 특전을 베풀어 이들의 혼인을 성립시켜 해로(偕老)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덕무(李德懋) 역시 김 · 신 부부의 혼인이라는 똑같은 사건을 다룬 작품을 남겼는데, 전(傳) 형식의 「김신부부전(金申夫婦傳)」이다. 정조가 이 사건을 이덕무에게 기록하게 한 것이 「김신부부전」이라면, 민간에서 이 혼인에 주목하여 이옥이 희곡의 틀을 빌어 기록한 것이 「동상기」이다.
이옥의 「동상기」와 이덕무의 「김신부부전」은 희곡과 전이라는 장르적 차이뿐만 아니라 내용의 측면에서도 미묘하게 다른 점이 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동상기」에서는 김희집과 신 씨 여자가 서얼임이 나타나지 않으며, 혼인을 가로막는 원인도 신분 때문이 아니라는 분석이 있다. 한편, 「김신부부전」에서는 김희집의 혼인을 방해하는 직접적인 원인은 ‘서얼’이라는 신분 때문이고, 이는 작가 이덕무가 서얼이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동상기」는 가난한 백성에게 덕화(德化)를 베푼 임금을 찬양한다는 주제 아래 오락적 요소가 가미된 텍스트이며, 희곡을 모방했지만 공연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동상기」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동상기」는 조선 후기 개성이 강한 문학 작품을 다수 창작한 이옥이 중국의 희곡 「서상기」를 모방한 작품으로, 가난한 백성에게 덕화를 베푼 정조를 찬양하면서도 작품 안에 오락적 요소를 가미한 흥미로운 텍스트이다. 이옥의 문학적 역량을 확인할 수 있으며, 문학사의 측면에서는 중국의 희곡 작품을 조선 후기에 어떻게 수용하고 또 변주했는지를 검토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