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옷 / 대례복
활옷 / 대례복
의생활
개념
인간이 몸 위에 입는 천이나 가죽 등으로 된 물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옷은 인간이 몸 위에 입는 천이나 가죽 등으로 된 물건이다. 우리의 고대 복식은 스키타이계 복식에서 원류를 찾을 수 있다. 옷이 상하로 구분되어 있고, 소매통이나 바지통이 좁고 허리에 띠를 매는 것이 특징이다. 한사군 설치 이래로 중국문화권의 영향을 받아 예복과 관복에 중국식 복식제도가 도입되면서 관인계급의 옷에서는 변화가 생긴 반면, 일반 서민층에서는 고유의 복식이 대체로 유지되었다. 개화기 이후 양복과 양장이 유행하면서 획기적인 변모가 이루어졌다. 또 섬유산업의 발달과 더불어 기성복의 기틀이 잡히면서 한복은 예복화하였다.

정의
인간이 몸 위에 입는 천이나 가죽 등으로 된 물건.
개설

우리의 옷은 우리민족의 오랜 역사와 얼을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각시대마다의 사회상과 문화상이 복식에 반영되어 왔고 발전되어 왔다. 인류의 복식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고고학적 발굴물과 민속학적 연구에 의하여 보면 유의(紐衣)시대를 거쳐 관두의(貫頭衣)시대의 원시시대를 거쳐 통수의(筒袖衣) 교임의(交袵衣)로 북방민족이나 아한대 지방의 의복이 된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신석기 시대의 유적에서 골침이 출토되었으므로 옷을 엮고 꿰매는데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청동기 시대에 와서는 북방유라시아 전역에 퍼져있던 스키타이계 문화권내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스키타이란 기원전 7∼3세기에 걸쳐 흑해를 중심으로 거주하던 유목기마민족을 말하며 “초원의 길”을 통하여 넓게 전파된 스키타이문화를 말한다. 스키타이 문화의 영향 중 대표적인 것이 복식양식이었다고 생각되며, 우리 나라 복식의 기본양식이 여기에 연유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후 기원전 108년에 우리 나라에 한사군이 설치되면서 중국문화권으로 전환되었으며 예복이나 관복에 중국의 복식제도를 도입하여 이중구조를 이루었다. 한편 중국에서도 스키타이계 복장을 호복이라 칭하였지만 이를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스키타이계 복장은 수많은 고분출토품의 인물상에서 알 수 있다. 즉 옷은 상하로 구분되어 있고, 소매통이나 바지 통이 좁고 허리에 띠를 매고 있어 우리 상고의 옷과 흡사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관모를 보면 변형모(弁形帽)나 조우관 또는 대륜식 입식관 등이 우리 나라 벽화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옷도 직령교임식 상의로써 둔부선까지의 길이로 소매는 좁고 가장자리에는 선(襈)이 둘러져 있음이 우리 기본형과 같은 형이다. 스키타이계 인물상에서 보면 바지는 가죽으로 된 세고(細袴)도 있고 소재가 직물로 바뀌면서 밑[襠]을 댄 궁고(窮袴)가 있어 우리 기본복식과 흡사하다. 신[靴]도 목이 있는 신으로 중국문헌에도 서호(西胡)제라고 하는데 이는 서쪽에 있는 스키타이계통을 말함이다. 우리 나라의 귀고리 · 팔찌 · 목걸이 · 반지 등의 장신구도 스키타이계와 유사한 특징을 갖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상과 같이 우리 나라의 고대복식은 그 원류를 스키타이계 복식에서 찾을 수 있어 우리 나라가 중국문화권에 영향을 받기 이전까지는 북방 유목 기마민족 복식문화권에 속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상대 옷의 기본형

우리민족의 기원은 북방 기마민족으로 중앙아시아 고원지대에서 동북쪽으로 이동하면서 만주 한반도에 자리를 잡았으며, 수렵과 유목생활에서 점차 농경생활로 정착하였다. 따라서 의복은 추위를 막고 수렵하기에 알맞는 가볍고 민첩한 것이어야 했고, 농경에도 불편 없는 것이어야 했다. 그리하여 상체에는 유(襦), 하체에는 고(袴), 머리에는 관모를 쓰며, 허리에는 대(帶)를 매고, 발에는 화(靴) 또는 이(履)를 신어 포피로서의 의복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1) 유(襦)

유는 기본형에 있어 깃을 왼쪽으로 여민 좌임에 소매가 좁은 통수이고 길이는 둔부까지 내려와 대를 띠며 고정시키다. 그리고 깃, 도련, 소매부리에는 길과 다른 색의 선을 둘렀다. 선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회장으로 그 여운을 남기게 되었다.

(2) 고(袴)

고는 바지를 말하며 남녀 모두 통이 좁고 길며 바지부리를 매어 오그린 궁고(窮袴)를 입었다. 궁고는 밑을 댄 바지를 말한다. 상류층은 바지 통이 넓은 대구고(大口袴)를 입었는데 이는 중국의 영향을 받았음을 나타낸다. 또 곤(褌)이라고 하는 가랑이가 짧은 노동용 바지가 있었는데 오늘날의 잠방이가 이에 속한다.

(3) 상(裳)

상은 치마를 말한다. 예의적인 뜻으로 여자만이 바지 위에 덧입었다. 일반적으로 길이가 길고 폭이 넓어 땅에 끌릴 정도 였으며 주름이 허리에서 치마 단까지 잡혀 있었다. 상류층의 상은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일하는 사람은 발목이 보일 정도로 짧게 입었다. 아래 단에는 선을 대어 입기도 하였다.

(4) 포(袍)

포는 오늘날의 두루마기이다. 형태는 유와 같으며 길이가 길어서 발목에서 올라올 정도이다. 허리에는 띠를 매었다. 깃 도련 수구에는 선이 둘러져 있다. 포는 방한용이라기 보다는 의례적 의미로 남녀구별 없이 입었다.

(5) 대(帶)

대는 유나 포에 항상 사용하던 것으로 그 기본형은 포백대(布帛帶)였다고 본다. 그리고 포백대의 매듭은 전후좌우 어느 방향으로라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고구려 벽화에서 보아도 매듭의 위치는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대체로 저고리의 대는 앞에서 맺고 있고 여자의 포는 뒤에서 맺고 있다. 이는 매듭이 겹쳐지면 불편하였을 것이므로 위치를 달리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상류층 남자용 과대나 교구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고 또 포백대에도 금은사 수나 비취모 등의 장식을 더하기도 했을 것이다.

(6) 관모(冠帽)

관모는 머리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감싸는 것으로 그것은 건(巾)이었다. 그 형태는 변(弁)형으로 고깔모양이며 정상이 뾰족한 관모인 것이다. 일명 절풍(折風)이라고도 하고 귀인들은 조우(鳥羽)를 2개씩 장식하기도 했다.

(7) 화(靴)와 이(履)

우리 민족은 북방에 속하며 방침(防浸)이나 방한(防寒)을 위하며 많이 신어온 신목이 긴 를 많이 신었을 것이다. 운두가 낮은 신인 이(履)는 남방족이 많이 신었으나 우리 민족은 오래 전부터 혼용하여 신어 왔다고 보는데 아마도 지리적 조건에서 온 것이라고 할 것이다.

삼국시대의 옷

기원전 2세기 말경 한(漢) 군현(郡縣)의 지배는 주변에 살고 있던 부족사회를 크게 자극하여 고구려 · 백제 · 신라의 집단국가를 이룩하게 하였다.

고구려의 옷

관모는 문헌에 의하면 관인과 서인의 관모가 서로 다르며 관인계급에서는 대관인(大官人)급과 일반 관인급과도 다르다. 문헌에 제일 먼저 나온 것은 책(幘)과 절풍(折風)이었다. 책은 귀인이나 대관계급의 전용관으로 서민계급에서는 전혀 착용할 수 없는 것이다. 중국의 영향으로 사용하게 되었지만, 고구려의 책은 중국의 책(幘)과 달리 모(帽)의 뒤에 늘어진 수(收)라는 헝겊이 없는 것이다. 절풍은 변(弁)과 같은 것으로 ‘弁’자 그 자체의 형태로서 삼각형 모에 양쪽 끈이 달려 있는 것이다. 이것을 고깔형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 2개의 조우를 꽂아서 관품(官品)이 없는 자와 구별하였다고 한다. 즉 절풍은 일반인의 관모였다.

여자들은 머리수건을 외출용으로 사용하였다. 머리 위에 완전히 감싸는 방법과 정수리를 내놓는 방법이 고구려벽화에서 발견되며, 아마도 기후관계에 따라 그 형태가 달랐으리라고 본다. 건귁(巾幗)이라는 여성의 쓰개는 가체(加髢)의 일종이라고 한다. 현재까지 알려진 고분벽화와 고문헌과를 대조하여 보면 우리 상대복식의 기본형 그대로이며 외래문화의 영향으로 다소 길이와 너비가 많이 너그러워졌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유는 초기와 중기 후기로 옮겨지면서 기본형에서 좌측으로 여며지던 여밈이 우임으로 옮겨짐을 고분벽화에서 알 수 있다. 그러면서 유의 소매통이 넉넉해져서, 즉 착수형(窄袖形)에서 광수형(廣袖形)으로 바뀌고 있다. 그리고 고구려 중기에는 두 가지가 혼용되다가 말엽에는 완전히 바뀌어 우임에 광수가 되었는데 이것은 중국복식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궁고(窮袴) 또는 세고(細袴)가 대구고(大口袴)로 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세고는 가죽으로 만든 통이 좁은 형태로 말타기에 편리한 형이라고 생각된다. 궁고는 가죽에서 직물로 소재가 바뀌면서 밑을 달아서 편하게 한 고(袴)이다. 대구고는 너그러운 고를 말한다. 대구고와 궁고 · 세고는 그 길이에 따라 구별되면서 착용자의 신분에도 관계가 있었다. 고는 남자 전용물이 아니고 여자도 평상시에는 항시 착용하였음을 벽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상(裳)은 특히 여자에게 의례적으로 고 위에 덧입었음을 벽화에서 볼 수 있다. 여자용 상에 대하여 문헌에서 보면 군(裙)이라고 표현되기도 하였다. 군이란 상보다 길이나 폭이 더 넓은 것이라고 보며 상류층에서 주로 착용하였다고 본다. 고분벽화에도 상은 일반적으로 길이가 길어 땅에 끌릴 정도이며 허리에서 치마 단까지 주름이 곧게 잡혀 있다. 그리고 단에는 선을 대고 있다. 당시 상의 길이에 따라 귀천을 가렸음을 알 수 있다.

포(袍는) 고구려 벽화에서 귀인인 듯한 인물이 자색의 대수포를 입고 있으며 시인급(侍人級)은 착수포를 입어, 그 구별이 나타나고 있다. 포는 유와 같은 형이며 다만 길이만 긴 것이다. 포도 방한용으로 착용했으리라 보나 차츰 의례적으로 사용되었다고 생각된다. 대(帶)도 벽화에서 보면 주로 포백대만 보이나 여러 가지 혁대도 사용되었다. 혁대에는 과판(銙板)이나 교구(鉸具)가 구비되어 있는데 이것은 주로 남자용이었다고 본다. 다음은 화(靴)와 이(履)로서 문헌에 보면 두 가지가 모두 착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화는 무풍적인 북방족이 신는 신으로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다. 이는 화와 혼용되어 가죽으로 만들어졌다.

백제의 옷

백제는 이미 북방에서 중국문화의 영향을 짙게 받아온 이주 집단으로 가장 세련된 귀족문화를 성립하였다. 백제의 복식제도는 계급적 분화가 현저하게 나타나 있다. 문헌에 의하면 삼국은 기본복식에 있어 대동소이 하다고 하였으니 그 특색만 들어서 알아본다. 백제는 제7대 고이왕 27년(260) 품관의 복색을 정한 바가 있었는데 관식(冠飾)과 의대색(衣帶色)으로 상하의 등위를 구별해 놓았다.

관모는 일품관(一品官)에서 육품관(六品官)까지는 은화를 장식하고 7품에서 16품까지는 장식이 없었다. 즉 고구려의 조우관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되며 조우를 은화로 한 것까지는 자대(紫帶)이고 8품은 조색(皂色, 검은 색), 9품은 적대(赤帶), 10품은 청대(靑帶), 11품과 12품 황대(黃帶), 13품과 16품은 백대(白帶)로 정하였다. 관복은 비색(緋色) 의를 입도록 하여 관인과 평민과 구별하였다. 의복의 형태는 양직공도의 백제 사신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포는 대수포이고 고는 관고였음을 알 수 있다.

왕복은 『당서(唐書)』 백제조에서 보면 대수자포(大袖紫袍)에 청금고(靑錦袴)를 입고 소피대(素皮帶)를 띠었으며 오혁리(烏革履)를 신었고 금화(金花)를 장식한 오라관(烏羅冠)을 착용하였다고 하였다. 평민에게는 왕복의 자색과 관복의 비색을 금하였다. 1971년 7월 공주에서 제25대 무령왕릉이 발견되어 왕과 왕비의 금제 관식, 금제 귀고리, 목걸이, 팔찌, 왕의 금제 뒤꽂이, 은제 과대와 패식(佩飾) 그리고 금동 · 은제의 식리(飾履) 두켤레 등 총 52종 3,496점이 출토되었다. 이로써 당시 호화스러움을 짐작하게 한다.

신라의 옷

처음 육촌(六村)에서 출발한 신라는 가장 신분관념이 뚜렷하였다. 그리하여 골(骨 : 聖骨, 眞骨)과 품(品 : 六頭品, 五頭品, 四頭品)을 확립하였는데 그 구분이 매우 엄격하였다. 신라는 제23대 법흥왕 때 의복제도를 정하였다. 즉 신라의 관제는 17등급이 있었는데 1∼5등급까지는 진골이 상급으로 자색의, 6∼9등급은 육두품으로 비의(緋衣), 12∼17등급은 사두품으로 황의(黃衣)를 정하였다. 이는 중국의 사색공복제도를 본뜬 것이었다. 그러나 의제는 그대로이고 색만 사색이었다고 본다. 복두에 단령은 제28대 진덕여왕 2년(648)에 받아들였고 그후 고려를 거쳐 조선조까지 지속되었다. 경주를 중심으로 발굴된 장식품은 그 당시의 복식이 얼마나 화려하였던가를 짐작케 한다. 복식은 삼국이 대동소이하였다고 본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달성한 이후로는 문화가 완숙하여졌고 사치가 심하여져서 제42대 흥덕왕은 7(832)년에 복식금제령을 내렸다. 금령에는 20종의 복식에 10계급의 착용규정을 상세하게 정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 시대 복식제도의 전모를 찾아볼 수 있다고 하겠다. 이 금제에서 보면 문무왕(文武王) 이래의 친당정책이 복식에도 영향을 끼쳐 관리의 관모가 중국과 같이 복두로 변했음을 볼 수 있다. 반비, 배당, 표가 중국제이고 표의도 중국의 활수포의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문무왕 4년(664)에 여복을 개혁하여 의관이 중국의 것과 같게 되었다는 『삼국사기』 색복조의 기록은 중국 여자 예복이 우리 나라에도 도입되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① 관모(冠帽) : 삼국통일전의 관모는 기본복식에서 보아온 관모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신라통일 후에는 관리들에게 복두 일색이 되었다.

② 표의(表衣) : 즉 포를 말하는 것으로 당시 신라에서는 신분의 귀천 없이 남녀 모두가 표의를 입었다. 그러나 골품계급과 평민계급에는 차이가 있어 평민은 고유의 포제로 좁은 소매였고 상류층에서는 활수형이고 좀 너그러워졌다고 본다.

③ 고(袴) : 복식금제에서 보면 삼국시대가 모두 이때에 와서도 역시 평상시에는 남녀가 고를 입었다고 보는데 상류층에서는 대구고, 서민은 궁고 그대로였다고 본다.

④ 반비(半臂) : 소매를 짧게 해서 반비라고 하였는데 오늘날의 배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반비는 골품계급에게만 허용된 것이었다.

⑤ 단의(短衣) : 여인 전용으로 유(襦)인데 치마를 유 위에 입게 되어 유의 길이가 짧아지면서 단의라고 하였으리라고 본다.

⑥ 상(裳 · 內裳, 表裳) : 표상은 겉에 입는 치마이고 내상은 밑에 입는 치마로서 다분히 의식적인 것이라고 본다. 오두품 이상 특수층만 입었으며 그 재료도 고급품으로 매우 사치했음을 알 수 있다.

⑦ 요대(腰帶) : 표의의 대로 보이며 남자들은 소재가 오서(烏犀)나 철(鐵) · 유(鍮) · 은(銀) 등이 있고 여자용은 오두품과 사두품이 같은 소재인데 금은사나 공작미(孔雀尾) 비취모(翡翠毛)를 넣어 짠 대단히 화려한 것이라고 본다. 사두품녀도 비단으로 하고 있다.

⑧ 요반(腰襻) : 치마허리와 치마허리끈을 말하는 것으로 단의 위에 입은 치마의 허리 아래로 드러나므로 매우 좋은 비단을 쓴 듯하다. 평민도 능견을 사용하였으므로 매우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⑨ 배당(褙襠) : 일종의 반비계통으로서 반비와 달리 소매가 없는 것이다. 배당은 여인 전용으로 평민부녀자에게는 착용이 허용되지 않았다.

⑩ 표(裱) : 당나라에서 들어온 것으로 양어깨에 자유롭게 걸쳐 느린 부드러운 감의 여성용 긴 목도리이다.

⑪ 말(襪)과 말요(襪袎) : 말은 버선을 말하며 면화가 들어오기 전인 그 옛날에는 비단버선을 신었다. 말요는 버선목으로 끈이 있었다고 보며, 여성전용으로 좋은 비단을 쓴 것으로 본다.

⑫ 화(靴)와 화대(靴帶) · 이(履) : 기본복식에서와 같이 화와 이를 신었다. 남자의 화에는 화대가 있어 계급에 따라서 그 교구로서 조이는데 재료가 달랐음을 금제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즉 진골대등(眞骨大等)은 은문백옥(隱文白玉), 육두품은 오 · 서 · 유 · 철 등으로, 삼두품은 철 · 동 등으로 사용하였다.

통일신라시대부터 남녀관리와 부인은 모두 중국제를 받아들여 우리 나라의 복식이 이중구조를 이루게 되었다.

고려시대의 옷

고려의 복식 변천을 보면 처음에는 우리 복식 위에 당제, 송제 등의 영향을 받았고 다음에는 원(元)나라의 복속으로 몽고복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말엽에는 원의 쇠망으로 신흥 국가인 명나라 제도를 본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지배급인 상류층 관인계급에 한정된 제도상의 변천에 불과하였고, 서민층에서는 우리 고유 복식을 그대로 답습하여 왔다.

옷의 변천

오대 · 송 복식 영향기

건국초에는 신라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4대 광종대에 사색공복제도(四色公服制度)를 제정하였다. 자(紫) · 단(丹) · 비(緋) · 녹(綠)의 사색으로 사회적으로는 색복계급을 발생시켰다. 백관이 사색공복을 착용하면서 왕은 국초부터 상색(緗色), 즉 황색의 포를 착용하였다. 황색은 중국의 중지색(中之色) · 군지색(君之色)이라고 하여 일반에게는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왕이 이를 입었으며 충렬왕 때는 중국제도와 같이 지황(芝黃)을 하기도 하였다.

이 당시 복식에 대한 문헌으로는 서긍(徐兢)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을 찾아 볼 수밖에 없다. 의종대에 이르러 상정고금례(詳定古今禮)가 『고려사』 여복지(輿服志)에 나와 있으나 나라가 어수선하여 얼마나 준용되었는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여복에서 송복식 영향을 알아보면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金富軾)은 “고려의 국가제도는 나제(羅制)에 많이 의존했는데 조정에서 사녀(士女)의 복색(服色)은 당의 유제를 따르고 있다.”고 표현하였다. 또 송사신이 연회석에서 창녀(倡女)가 입고 있는 활수의(闊袖衣) · 색사대(色絲帶) · 대군(大裙)을 보고 삼대(三代)의 복식이 여기에 다 있음은 의외라고 감탄하였다니 중국복식의 영향이 적지 않았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원(몽고) 복식 영향기

원나라에 복속하고 있던 80여년 간 일부 향원심(向元心)이 일어 몽고풍을 따르고자 하기도 하였다. 충렬왕은 세자였을 당시 변발호복(辮髮胡服)에 개체(開剃)하고 있었다. 개체란 몽고풍으로 머리의 둘레를 깎고 정수리 머리를 땋아 늘이는 것이다. 충렬왕 4년(1278년)에는 한 때 개체변발 할 것을 명한 적이 있으나 강제적인 것은 아니었다. 원 자체도 중국에 동화되어 관복을 사용하여 우리와 대동소이한 것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 서민층에서는 기본 복식에 큰 변화가 없었다.

명복식 영향기

원이 쇠퇴하자 고려 31대 공민왕은 문무백관은 흑의 청립으로 하고 자주성을 모색하였으며 왕은 구류면(九旒冕) 구장복(九章服) 대신 십이류면(十二旒冕) 십이장복(十二章服)을 착용하였다. 우왕 13년(1387년)에는 1품(一品)부터 9품(九品)까지 모두 사모 단령을 착용하였으며 그 품에 따라 대(帶)에 차이를 두었다. 여복에 있어서는 공민왕 때 왕비관복이 사여되었는데, 명의 명부복으로 우리는 이를 적의(翟衣)라고 하였다.

남자 옷

왕복

제복 · 조복 · 공복 · 상복 · 편복으로 구별된다.

① 제복 : 면복으로 구류면 구장복을 착용하여 오다가 말엽에 한 때 십이류면 십이장복을 착용하였으나 곧 다시 중국의 친왕례에 의하여 되돌아갔다. 면복은 머리에는 구류의 면류관을 쓰고 의복은 곤복(袞服)으로서 현색(玄色)인데 오장문(五章紋)을 그리고 있다. 그 밑에는 백라(白羅)로 된 중단(中單)을 입었는데 깃에 9개의 보문(黼紋 : 도끼문)을 수놓았다. 중단 위에 상(裳)을 입었는데 4장(四章)을 수놓아 현색의(玄色衣)의 5장문(五章紋)과 합하면 9장문(九章紋)이 된다. 여기에 훈색의 폐슬(蔽膝)에는 산과 화의 2장문(二章紋)을 수놓았다. 그 위에 대대 · 혁대를 띠고 뒤에 수(綬)를 늘이는데 주조수(朱組綬)로서 옥환(玉環)을 달았다. 양옆으로 패옥(佩玉)을 늘이고 흰색 말과 붉은색 석(舃)을 신었다. 규(圭)를 들었다.

② 조복 : 왕이 백관과 사민을 접견할 때 착용한다. 『고려사』 여복지에서는 왕의 조복은 자황포(柘黃袍)를 착용하였고 그후 의종조에서는 자황포(赭黃袍)와 치황의(梔黃衣)를 입었다. 충렬왕은 지황으로 색을 바꾸었다 얼마 안가 다시 황포로 착용하였다. 공민왕은 원유관과 강사포를 착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③ 공복(公服) : 왕이 사신을 접견할 때 착용하던 복장이다. 『고려도경』에서 보면 공복은 자라공복에 옥대를 띠고 아홀(牙笏 : 상아홀)을 들었다고 한다.

④ 상복(常服) : 왕의 평상시 집무복이다. 『고려도경』에는 오사고모에 소매통이 좁은 상색(緗色), 즉 담황색포에 자색라로 된 늑건[帶]을 띠었다고 하였다. 고려 초 · 중기에는 황색 상복을 입었으니 어느 정도 자주성을 띠고 있었다고 본다.

⑤ 연복(燕服 : 便服) : 국왕도 연거시에는 일반 시민과 다름없이 조건(皁巾)에 백저포를 착용하였다고 문헌에 있으니 연거복으로는 서민복 그대로를 습용하여 국속 복식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백관복

백관(百官)의 관복에도 제복 · 조복 · 공복 · 상복이 있었다.

① 제복 : 의종조에 와서 처음 상정고금례에 제도를 마련하였으나 실제로 시행이 어려운 시기였음으로 확실하지가 않다. 제도는 칠류면 칠장복 · 오류면 오장복 · 삼류면 삼장복 · 삼류면 일장복 · 평면 무장복 등이다.

② 조복 : 고려시대의 조복은 존재 여부를 알 길이 없다. 의종조의 상정고금례에서 보면 백관은 조복을 착용한다라는 기록 뿐 자세한 제도는 기록이 없다. 그러므로 확실한 것을 알 수가 없다. 『고려사』 여복지에서 보면 공민왕 21년(1372) 11월 교지에 조복을 착용하자고 하였으니 조복의 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고려불화 인물상에도 양관에 조복차림이 있으므로 조복착용을 짐작하게 한다.

③ 공복 : 고려의 공복은 4대 광종 11월에 제정되었다. 문관은 모두 복두(幞頭)를 썼으며 자 · 비 · 녹 · 조(皂)색으로 포를 입고 대로써 구별이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금어대(金魚帶) 또는 은어대(銀魚帶)를 찼다. 금어대와 은어대는 송제를 본 딴 것이다. 처음에는 어부(魚符)라고 하였는데 여기에 관성명(官姓名)을 새기고 좌우 2개로 쪼개어 왼쪽은 궁내에 바치고 오른쪽은 갖고 있다가 궁내 출입시에 맞추어 보게 되어 있었다. 이것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으므로 어대라 하였다. 원대로 바뀌면서 없어졌다.

④ 상복 : 상복은 문헌에 명시된 것이 없는데 앞의 공복을 그대로 입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민서복 · 편복

민서란 서민을 말한다. 우리의 기본 복식은 삼국시대 이래 서민 계급에 의해 유지되어 왔다. 왕도 연거시에는 서민복과 별다름이 없었음으로 백관도 집에서는 우리 국속에서 벗어나지 않은 평복일 것이다.

① 두식 : 『고려도경』에 보면 서민의 미혼 남자는 흑승(黑繩)으로 머리를 묶고 나머지를 뒤로 늘였고 여자는 홍라로 묶어 느려서 비슷하였다고 하였다. 성인의 두건은 왕 이하 아랫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비슷하고 재료에 차이가 있었다고 본다. 같은 감이라도 승수에 따라 구별하였을 것이고, 특히 조건은 마포나 갈포를 검게 물들여 쓴 것으로 본다. 상하가 다른 것은 진사나 농상은 건사대(巾四帶)라고 하고 귀인은 양대(兩帶)로써 구분하였다. 이 형태는 고려경(高麗鏡) 배문의 인물도로 알 수 있다.

그리고 말엽의 초상화를 보면 몽고복식 영향기에는 몽고식의 평정건(平頂巾)과 발립(鈸笠 : 몽고식 모자)도 착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몽고복속기 때 몽고 풍속으로 머리 둘레를 깎고 정수리 부분의 머리를 땋아 늘인 개체변발을 하기도 하였으나 우왕 때 비로소 호복을 개혁하여 명나라의 제도를 따랐다.

② 포(袍) : 왕의 편거복 포는 평민과 같은 백저포를 착용하였는데 이를 보면 삼국시대에 유나 포에 있던 이색선이 없어졌음을 짐작하게 된다. 그리고 안향(安珦) 상을 보면 깃 나비의 중심에 몽고식 바느질선이 있고 포의 양옆선은 트였고 받침옷은 청색으로 되어있다. 여밈은 깊고 홍색 포백대를 띤 듯하다. 머리에는 평정건을 쓰고 있다. 또 이조년(李兆年) 상을 보면 홍포에 깃 중심에 바느질선이 있고 양옆이 반정도 트여 있으며 받침옷은 청색이고 여밈은 깊게 되어 있다. 머리에는 발립을 쓰고 있다. 띠는 동색(同色) 포백대(布帛帶, 직물로 된 띠)이다. 방배동에서 발견된 목우상 중 3점의 남자상은 서민의 포착용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포를 보면 옆은 트이지 않고 대를 띠고 있다.

③ 의(衣) : 『고려도경』을 보면 의라고 표현되고 있는데 온양 박물관 소장품 중에도 자의(紫衣)라고 명칭이 쓰여진 복식이 있다. 길이로 보아 포와 같으나 문헌에 나온 포와 의의 형태 차이를 명확히는 알 수 없다.

④ 요선철릭(要線帖裏) : 14세기의 유물로 해인사의 비로자나불 복장품으로 귀중한 자료이다. 이것의 특이한 점은 일반 철릭과 달리 허리부분에 요선(腰線)이 둘러져 있는데 앞에는 9줄, 뒤에는 10줄 의 턱크(tuck)를 가로로 잡고, 그 위아래를 두줄로 곱게 집어서 온당침하였다. 그리고 치마폭은 모두 8폭으로 곱게 맞주름 잡았다. 깃은 몽고식으로 가운데 줄이 있으며 여밈은 깊다. 안고름용 끈이 달려 있다.

⑤ 답호(褡胡) : 통일신라시대부터 내려오던 반비(半譬)는 고려에서도 유지되었다고 본다. 고려 후기가 되면서 명칭이 바꾸어져서 답호라고 하였다고 본다. 충남 서산 문수사에서 나온 불복장유물인 답호는 이중깃이고 무를 단 양옆이 트였다. 무 부분의 트임에는 주름을 잡고, 주름 위를 겨드랑 밑에 고정시켰다. 이와 같은 형태는 해인사 복장에서도 나왔는데 조선 초기까지도 지속되었다고 본다.

⑥ 고(袴) · 화(靴) · 이(履) : 모두 우리 기본 복식과 큰 차이는 없다고 본다.

여자 옷

고려 초기부터 상류층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복식 제도를 그대로 계승해 말엽까지 지속했다고 보며 서민 사회에서는 우리 고유 복식에 두드러진 변화는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고려말에 이르면서 유의 길이가 짧아지면서 고름이 생겼다.

왕비복

『고려도경』 귀부조(貴婦條)에서 보면 “왕비 복색은 홍색이었으며 회수(繪繡)를 하였는데 국관이나 서민복에는 이를 금한다.”고 하였다. 여기에는 더 이상의 설명이 없으므로 확실하지는 않지만 송나라의 후부관복(后婦官服)인 대수(大袖) 장군(長裙)의 주의(朱衣)나 예의와 비슷했으리라 본다. 또 대홍의는 회수를 한 활수의와 색사대로 된 왕비상복이 아닌지 확실하지 않다. 평거복은 저고리 치마를 기본으로 한 우리 고유복식이 몇 있으리라고 본다. 원 복속기가 되면서는 왕비가 몽고족이 많았으므로 영향이 컸을 것이다. 그리고 고고관이 족두리라고 하며 우리 나라에 와서 퍼졌음이 『고려사』에 실려있다.

한편 14세기 것으로 일본의 서복사(西福寺)에 소장되어 있는 「관경서품변상도(觀經序品変相圖)」 중에 왕비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왕비의 담홍색포는 광수이고 수구와 깃둘레 도련에 짙은 검정인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선이 둘러져 있다. 그 밑에는 담홍색의 군(裙)을 뒤에 끌리도록 하였으니 폭도 대단히 넓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위에 홍색으로 반수의 넓은 수구에는 백색 주름장식이 달려있다. 길이는 발목 정도이다. 허리에는 띠를 띄고 홍색 매듭장식을 길게 늘이고 있다. 그 뒤에 왕비는 아니지만 시녀들이 9명 두 줄로 서 있는데 그 입은 단의와 군은 길게 입고 있는데 이는 왕비도 같은 모습일 것이다. 즉 흥덕왕 복식금제의 단의와 군, 요반(치마허리)을 입고 표(裱)를 두르고 있다. 이로써 왕비예복은 통일신라 때부터 고려말까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말 공민왕 19년(1370) 5월에 효자황후가 왕비에게 관복을 내렸는데 이것은 송조의 명부복인 적의이다. 명에서 명부복을 제정하기 전의 것이다. 머리에는 칠적관(七翟冠), 즉 칠휘이봉관(七翬二鳳冠)을 쓰고 청색에 9줄로 등분하여 적(翟)을 수놓았다. 이것이 적의(翟衣)이다. 밑에는 중단(中單)이라고 하는 백사(白紗)로 된 깃에는 보문(黼紋)을 수놓고 홍라로 선을 둘렀다. 폐슬(蔽膝)은 『고려사』나 『송사』 여복지에서 보면 청색으로 생각된다. 대대(大帶)도 청색이었고 혁대는 금구철(金鉤變)이 장식되어 있었다. 수(綬)를 뒤에 드리웠고, 말과 석은 청색이었다.

귀부녀복

서긍의 『고려도경』과 고려불화 · 벽화 · 인물도를 유물 등을 통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두식 : 출가 전 여자는 홍라로 머리를 묶고 그 여발을 뒤로 늘인다고 하였으니 부녀의 머리 모양은 모두 머리를 틀어서 강라로 묶고 여기에 작은 비녀를 꽂았으며 여발은 뒤에 늘였다. 조선조의 새앙낭자 또는 새앙머리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북학의(北學議)』 여복조에서 보면 몽고풍습으로 들어온 가체풍습이 있었다고 하는데 원 복속기에 우리 나라에서는 가체를 많이 했던 것 같다.

② 쓰개 : 몽수(蒙首)와 입(笠)이 있었다. 부인들이 외출할 때는 몽수를 썼다고 하는데 일명 개두(蓋頭)라고도 하였으며 폭은 3폭이나 되고 길이는 8자가 되며 머리를 덮고 눈만 보이도록 하고 나머지는 끌리게 하였다고 한다. 몽수는 서역(西域) 부인의 두식이 수 · 당을 거쳐 고려에 들어온 것이다. 『고려도경』에서 보면 귀부인의 외출시에는 조라(皂羅)로 몽수를 하고 그 위에 입(笠)을 더 하였다 하며 왕비는 입을 홍색으로 하였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몽수를 썼는데 입을 쓰고 위에 몽수를 썼으며 이것이 조선조의 너울의 기원이 되었다.

③ 의복 : 고려시대 귀부복은 통일신라시대 때 받아들인 후 고려말기 까지도 그대로 지속되어 내려 왔다. 연거복으로는 남녀 모두 백저포를 입었는데 감람나무 문양이 있는 띠를 띠었다. 허리띠에는 5채의 금방울을 매어 달았으며 또 사향같은 향료를 넣은 금낭을 찼는데 많이 차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일본 대덕사(大德寺) 소장 「수월관음도」에서 보면 공양물을 가지고 가는 두 여인의 뒷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좌측 여인은 포를 입고 있고 우측은 유와 상의 모습이다.

고려의 14세기의 복식 유물로는 온양민속박물관 소장품으로 자의(紫衣) · 중의(中衣) · 상의(上衣) 3점이 있다. 자의는 포형으로 직령교임식이고 여밈이 다소 깊으며 앞 뒤 길이의 차이가 있고 옆이 트여져 있다. 대는 보이지 않는데 확실하지 않으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이와 흡사하지만 앞 뒤 차이는 없는 포가 「문희귀환도(文姬歸環圖)」에서도 보인다. 여기에는 포백대가 있다. 포 밑에서 유와 상을 착용하였을 것이다.

『고려도경』에 보면 상하 귀천 없이 백저의와 황상(黃裳)을 입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초기에는 유를 먼저 입고 그 위에 상을 입는 방법으로 이는 통일신라시대 방법이다. 일본의 지은원 소장 「관경변상도」 중에 공양인들의 모습에 보인다. 또 일본 대덕사의 「수월관음도」에 우측 여인은 밑에 치마를 입고 의, 즉 유를 위로 입고 있는데 유의 길이가 다소 짧아져서 띠가 없어지고 앞 여밈을 위하여 단추나 작은 고름이 생기게 되었다고 보며 이는 원복속기의 복색을 여실히 보여준다. 『고려도경』에는 선군(旋裙)이라는 명칭도 보인다.

서민여복

우리 나라의 복식이 우리 전통 복식과 중국 복식과 이중구조 속에서도 가장 우리 것을 고수해 온 것이 서민복이었다. 수발도 초기에는 귀천 없이 동일하였으리라 본다. 고려 후기에 체두변발의 몽고풍이 들어오면서부터는 변발을 본받았다고 한다. 쓰개 종류로 서민도 몽수를 착용했는데 아래로 늘이지 않고 머리 위에 접어서 얹었다고 하니 거추장스러움을 없애기 위함이었으리라고 본다.

의복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확실하지 않으나 일하기에 불편한 백저의를 항시 입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도경』 비첩조(婢妾條)나 천사조(賤使條)에 보면 그 복식이 비슷하다 하였으니 큰 차이도 없었던 것 같고 늑건이나 수식에만 등차가 있었을 것이다. 버선은 포로 만든 백말이 상하 통용되었으며 우리의 기본 복식이 그대로 이어졌다고 본다. 특히 말엽의 띠가 없어지면서 매듭단추 또는 고름이 생겨났고 옷의 여밈도 직수형(直垂形)에서 중거형(重裾形)으로 변했고, 깃도 목판깃이며, 동정도 이미 고려말에 있었음이 확인된다.

조선시대의 옷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그대로 명복식의 영향을 받으며 변천해왔으며 중 · 후기에 들어와서는 임진 · 병자 양란을 겪으면서 명 대신 청이 들어왔으나 관복은 그대로 고수하면서 우리 민족 복식을 형성하고 정착시켜 나갔다. 고종 시대에 이르면서 청의 쇠망으로 중국의 기반에서 벗어나 고종 34년만에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위에 오르게 되었다.

남자 옷

조선시대의 남자복식은 왕복과 왕세자복 · 백관복 · 편복 · 사인복 · 서민복으로 나누어지는데 어느 시대보다도 신분제도가 엄격하여 등위를 가르기 위한 복식의 제한이 엄격하였다.

왕복

왕은 대례복 제복으로 면류관에 곤복을 착용하고 조복에 속하는 원유관 · 강사포, 상복에는 익선관 · 곤룡포가 있었다. 이외에 국난을 당했을 때는 전립융복을 착용하였으며 연거시에는 편복을 입었다.

① 면복(冕服)

㉮ 면류관 : 이미 고려 때부터 사용되어 오던 구류면 구장복 그대로이다. 그리고 명이 쇠망한 후에는 제19대 숙종 때 명으로부터 사여받은 면복을 본따서 국내에서 지어 입었다. 이 당시 그 제도가 일정치 않아 분분하였으나 제21대 영조 23년(1747)에 『상방정례(尙方定例)』에 일정한 제도를 정해 놓았다. 국말에 와서는 고종이 황제위에 오르자 십이류면 십이장복을 착용하였다. 순종 황제의 어진에서 십이류면 십이장복을 볼 수 있다.

먼저 구류면을 『국조오례의서례』 제복도설에서 보면 평천판의 너비는 8촌, 길이는 1척 6촌이며, 앞은 둥글고 뒤는 네모졌고, 겉은 현색증(玄色繒)으로 덮고 밑은 훈색증으로 쌌다. 그리고 관신(모자의 높이) 앞의 높이는 8촌 5분이고, 뒤의 높이는 9촌 5분으로 앞으로 숙이고 있다. 그리고 금잠(金簪)을 꽂았다. 면류는 9류로 앞 뒤 18류이며, 매 류마다 주 · 백 · 창 · 황 · 흑의 5채색을 주 · 백 · 창 · 황 · 흑 · 주 · 백 · 창 · 황의 차례로 꿰었는데 유의 길이는 9촌이다. 면관의 옆에는 현색담(玄色紞)이 있었고 여기에 청옥으로 청광충이(靑纊充耳)를 이어서 백옥진(白玉瑱)을 늘어 뜨렸다. 굉이 있어 자조(紫組) 두 줄을 관신(冠身) 양쪽 무(武 : 모자)에 부착하여 이를 턱 밑에서 매고 그 나머지는 늘어뜨렸다. 또 주조(朱組) 한 줄을 비녀 왼쪽에 얽어매어 턱밑을 돌려 오른쪽 위로 올려서 비녀에 매고 나머지를 늘어뜨려 수식으로 하였다.

㉯ 곤복(袞服) : 우리의 국왕은 구장복이다가 말엽에 십이장복이 되었다. 구장복은 고려와 같으므로 생략하고 십이장문을 보면 일(日) · 월(月) · 성진(星辰) · 산(山) · 용(龍) · 화충(華蟲) · 화(火) · 종이(宗彛) · 조(藻) · 미(米) · 보(黼) · 불(黻)이었다. 12장 중에서 일 · 월 · 성진 3장은 황제의 표시였다. 곤복인 현의에는 일 · 월은 양 어깨에, 성진과 산은 뒤에, 용과 화충은 양 소매에 직성하였다. 상(裳)은 훈색(纁色)으로 앞 뒤폭이 연속되어 거기에 화 · 종이 · 조 · 분미 · 보 · 불의 6장문을 두 줄 씩 하여 수 놓았다.

폐슬에는 훈색으로 하고 위에 용 1, 아래에 화 3개를 수놓았다. 혁대는 구장복과 같고 패옥(佩玉)이 구장복과 다른 것은 거(琚 : 옥장식형)가 하나 많은 2개였고 후수(後綬)에 구장복에는 소수(小綬 : 장식)가 4채(4가지색)인데 6채로 훈색 바탕에 황 · 백 · 적 · 현 · 표(縹 : 옥색) · 녹색으로 짠 것이다. 대대(大帶)는 구장복과 같으나 뉴약(紐約 : 매서 늘인 조대)은 청조(靑組)가 아닌 소조(素組 : 소색 매듭끈)였다. 말은 주단(朱緞)으로 하였고 석(舃)은 적단(赤緞)으로 하고 황색 조(條)로 가장자기를 둘러서 현색끈으로 매었다. 규(圭)는 백옥규로 위를 뾰족하게 하고 산형 4개를 조각하였다. 밑은 황기(黃綺 : 황색 비단) 또는 황금(黃錦)으로 묶고 황기낭에 넣었다.

방심곡령(方心曲領)은 고려시대에는 송의 방심곡령제에 따라 백라로 만들어 옷깃에 덧댄 것으로 좌록(左綠) · 우홍(右紅)의 끈을 양쪽에 달아 뒤로 매게 되어 있으나 조선조에서는 이와는 달리 방심이 곡령 하부에 달려 있어 가슴까지 내려 왔으며 곡령에 달린 끈이 없어졌다. 이 방심곡령은 『당사』나 『송사』 여복지에서는 보이나 『대명회전』에서는 곤복에 이것이 없다. 당 · 송에서는 신하의 제복도 면복이었으며 방심곡령이 부가되어 있었으나 명대에는 신하의 제복이 같은 양관이나 조복은 적색이고 제복은 청색으로 하였고 여기에 방심곡령을 더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도 명제에 따라 제복을 제정하였으므로 방심곡령은 제복에만 있었다. 왕의 면복은 대례 · 제복인데도 조선조에서는 친제시 방심곡령을 더하였다.

② 조복(원유관 · 강사포) : 조복으로 사용된 원유관 · 강사포는 삭망(朔望) · 조강(朝降) · 조강(詔降) · 진표(進表) · 조견(朝見)에 착용하였다. 국말에 황제가 되어서는 통천관(通天冠)으로 바뀌었다. 원유관은 현색라로 만들어 9량(梁)이었고 금잠을 꽂았고 황 · 창 · 백 · 주 · 흑의 차례로 오채옥을 가지고 전후 9옥씩 장식하였으며 양갓에 2줄의 주조(朱組)가 있어 턱밑에서 매고 나머지는 늘여뜨렸다. 통천관은 12량에 12수(首)의 부선(附蟬)이 있었고 각 양마다 5색 구슬을 12주씩 꿰어 장식하였으며 양편에 주영이 달렸고 관 위에는 옥잠을 꽂았다. 강사포는 포나 상은 강라(絳羅)로 만들고 중단은 백라로 하였다. 그리고 적색 선을 둘렀으며 깃에는 불문(黻紋) 11개를 그렸다. 그리고 패옥이나 수 · 말 · 석은 구장복과 같다.

③ 상복(常服) : 익선관과 곤룡포이다. 이는 왕의 시무복으로 용포라고도 하였다. 익선관은 모라(毛羅)로 싸고 양대각(兩大脚) 위에 양소각(兩小脚)을 첨부하여 향상시킨다. 국말 고종의 익선관은 오사(烏紗)로 쌌는데 양각은 절상(折上)하였다. 곤룡포는 대홍색으로 겨울에는 비단으로, 여름에는 사로 하여 오조원룡포(五爪圓龍袍)를 포의 전후와 좌우 어깨에 첨부하였다. 대는 옥대이고 화는 흑색 궤자피(麂子皮)로 하고 여름에는 흑칠피로 하였다. 황제의 곤룡포는 황색의 단령(團領)에 착수(窄袖)였으며 역시 오조룡보를 붙였다. 왕의 상복은 국난시를 위하여 보통 첩리(帖裡) 위에 답호를 입고 곤룡포를 입는다.

④ 연거복(편복) : 우리 나라의 왕은 솔선하여 검약함으로써 왕도의 근본으로 삼았다. 왕의 평상복은 사대부와 별 차이가 없으며 머리에는 망건상투관이었다.

왕세자복

왕복에 따라 면복 · 조복 · 공복 · 상복이 있었다. 고종이 황제위에 오르면서 세자도 황태자로 책봉되었으므로 명 황태자복을 따랐다.

① 면복 : 면류관은 팔류면(八旒冕)이다. 곤복의 제도는 구장복과 같은데 다만 장문이 다르다. 화 · 화충 · 종이 3장(三章)을 가지고 화 1개는 어깨에, 화 2개와 화충 · 종이 각 3개를 양소매에 그렸다. 중단은 구장복과 같으나 다만 깃에 불문을 9개 그렸다. 규는 『증보문헌비고』에서 청옥규칠촌(靑玉圭七寸)이라고 하였다. 이외에는 모두 구장복과 동제였다. 국말의 황태자의 곤복은 구장복을 그대로 착용하였다.

② 조복 : 육량관(六梁冠)에 적라의상(赤羅衣裳)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원유관이 8량으로 모라(帽羅)로 싸고 양갓에 끈이 달려 있고 매량 전후에 3채옥이 각 8개씩이 있었으며 나머지는 국왕 강사포와 동제였다.

③ 공복 : 세종 때 제정된 것으로 복두(幞頭) · 홍포(紅袍) · 서대(犀帶) · 흑화(黑靴)로 되어 있었다. 이 제도는 조선조 말까지 변함이 없었는데 이것은 조신의 1품 공복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도가 시행되지는 않은 것 같으며 오히려 상복을 가지고 이를 대신하였다.

④ 상복 : 『국조속오례의보』에서 보면 익선관은 모라(毛羅)로 싸고 양대각 뒤에 양소각을 첨부하여 향상시켰다. 곤룡포는 흑단(黑檀 : 여름에는 흑사)으로 하였으며 금수의 사조원룡보를 달았다. 띠는 옥대로써 흑단으로 싸고 금색으로 그렸다. 화는 흑궤자피(黑麂子皮)로 만들었는데 여름에는 흑칠피를 사용하였다.

⑤ 평상복 : 조선조의 국왕도 사인복과 별 차이가 없었듯이 세자복 역시 이 범주를 벗어 나지 않았다.

백관복

관리의 복식제도는 『경국대전』에서 완성을 보았는데, 그후 여러번 수정이 있었으나 큰 변동이 없었다. 관리에게는 특히 시복(時服)이 있었고 융복(戎服)이 있었으며, 무관에게는 군복(軍服 : 具軍服)의 제도가 있었다.

① 조복 : 대사 · 경축일 · 원단 · 동지 · 조칙을 반포할 때나 진표할 때 착용하였다. 머리에는 양관을 쓰는데 일명 금관이라고도 하였다. 그리고 양의 수에 따라 품위를 구별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1품은 5량관이고, 2품은 4량관, 3품은 3량관, 4 · 5 · 6품은 2량관, 7 · 8 · 9품은 1량관이었다. 조복은 『경국대전』에서 보면 1품에서 9품까지 동일하였다. 제일 위에 적초의를 입는다. 여기에는 청색 선이 있었다. 적초의 밑에 적초상을 둘렀는데 전 3폭, 후 4폭으로 청선을 둘렀다. 그 밑에 백초중단을 입는데 여기도 청색 선을 둘렀다. 폐슬은 적초의 위에 걸쳤는데 적색 초로 하고, 제색으로 선을 둘렀다. 대대는 적백단 2색으로 겹으로 하였다.

혁대는 품위에 따라 달랐다. 1품은 서대, 정2품은 삽금대(鈒金帶), 종2품은 소금대(素金帶), 정3품은 삽은대(鈒銀帶), 종3품과 4품은 소은대(素銀帶), 5품에서 9품까지는 흑각대(黑角帶)였다. 패옥은 1 · 2 · 3품은 번청옥(燔靑玉)으로 하고 4품에서 9품까지는 번백옥(燔白玉)이었다. 수(綬)는 무늬와 환(環)으로 품계를 가렸다. 1 · 2품은 황 · 녹 · 적 · 자 4색사로 운학문을 수놓았고 2개의 금환을 단다. 3품은 4색사로 반학문(盤鶴紋)을 수놓고, 2개의 은환을 달았다. 5 · 6품은 3색사로 연작문(練鵲紋)에다 2개의 동환을 달았다. 7 · 8 · 9품은 황녹 2색사로 계칙문(鸂鶒紋)을 수놓고 2개의 동환을 달고 밑에는 청사망(靑絲網 : 매듭망)을 맺었다.

말은 모두 백포로 하였고 혜는 모두 흑피혜를 신었다. 홀은 1품에서 4품까지는 상아홀이고 5품에서 9품까지는 목홀이었다. 그러나 국말에 와서는 변화가 있었다. 기본적인 바지, 저고리, 두루마기를 입고 그 위에 답호를 입었으며 그 위에는 청삼이 아니라 백초중단에 흑선을 두른 것이다. 그 위에 길이가 다소 짧은, 소매는 넓으며 좌우가 옆이 터진 적초의를 입었다. 폐슬은 간략해져서 작에 홍삼에 붙였고 목화를 신게되었다.

② 제복 : 문무관이 왕이 종묘 사직에 제사할 때 배제시(陪祭時) 착용하였다. 관은 양관으로 조복과 같다. 조복 양관은 금칠을 많이 하였으나 제복에는 일부만 금칠을 하였다. 나머지는 흑색이다. 제복의 구성은 조복과 같으나 다만 색이 백초의를 입고 흑삼을 입었다. 그리고 를 신었다. 상은 조복과 같다.

③ 공복 : 공사시에 또는 사은 관계로 배알할 때, 공사에 참여할 때 착용하였다. 공복에는 복두를 쓴다. 고려 때부터 있어 왔다. 공복은 소매가 넓은 단령으로 길이가 매우 길었다. 1품에서 정3품까지는 홍포, 종3품부터 6품까지는 청포, 7품에서 9품까지는 녹포를 착용하였다. 그후 3품 이상은 담홍포이고, 이하는 홍포로 하다가 다시 3품 이하의 홍포를 폐지하고 청록포로 변경하였다. 이렇게 변하면서 조선 후기에 와서는 어느 때부터인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④ 상복 : 문무관의 집무복이다. 머리에는 사모를 쓰는데 복두에서 시작된 것으로 처음에는 연각(軟脚)이다가 차차 경각(硬脚)으로 변했는데 이는 중기부터였다. 이후 사모는 시대에 따라 여러번 변화하였는데 중기에는 모체가 높아지고 양각의 폭이 넓어지면서 평직이 되었다. 말기에는 모체가 다시 낮아지고 양각의 폭은 여전하나 길이가 짧아졌다. 한때 앞으로 약간 굽어지기도 하였다. 사모는 국말까지 많이 쓰인 관모는 어느새 복두가 사모로 변하여 고종 때 복장 개혁시 대례복 · 소례복에도 사모를 착용하게 되었다.

포는 『경국대전』에서는 공복과 상복이 같았으나 『속대전』에서 보면 당상관 3품 이상은 공복에 담홍포를 입고 상복에는 현녹색을 착용하였으며, 당하관은 공복에 흉포를, 상복에는 현녹색포를 착용하였다. 국말에는 흑단령이 되었다. 대는 조복에서와 같았다. 말은 백포말이 되었고 화는 국말에 목화가 되었다.

흉배 : 상복에는 흉배를 달아서 특색을 나타냈다. 왕과 왕세자는 둥근 금사보를 달았고 관리의 상복에는 네모진 흉배를 앞뒤에 달았다. 단종 때 처음으로 흉배 제정이 있었는데 당상관만 달았다. 중국제를 이등체강 원칙에 따라 그후 연산군 11년(1505)에 1품에서 9품까지 하되 문양을 문관은 우리 나라에 있는 날짐승으로 하고 무관은 네발 짐승으로 하게 하였다.

이 제도는 임진 · 병자 양란으로 중단 되기도 하였으나 문란하게 되기도 하였다. 이는 19대 숙종 17년(1691)에 조신의 단령에 붙이는 흉배구제를 신명(申明)하도록 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영조 12년(1736)에는 간편하게 당상을 운학(雲鶴)흉배로 하고 당하는 백한(白鷳)흉배로 다시 정해 내려오다가 고종 8년(1871)에 당상관은 쌍학(雙鶴), 당하관은 단학(單鶴)으로, 무관 당상관은 쌍호(雙虎), 당하관은 단호(單虎)로 하여 국운이 다할때까지 사용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흥선대원군은 그의 기린(麒麟)흉배를 구(龜)흉배로 바꾸었다.

⑥ 시복 : 입시할 때나 공무를 볼 때 사모를 쓰고 홍포(정3품이상)였으나 흉배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옷감에 있어 시복에는 면포(綿布) · 마포(麻布)를 사용하게 하였다.

⑦ 융복 : 문무관 모두 몸을 경첩하게 해야 할 때 또는 왕행차에 수행할 때, 외국의 사신으로 파견될 때, 국난을 당하였을 때 착용하였다.

⑧ 군복(軍服 · 具軍服) : 갑옷과 투구의 받침 옷으로 또는 장신(將臣)의 공복 밑에 착용 되었다고 본다. 머리에는 전립(氈笠)은 쓰고 아래사람의 것은 벙거지라고도 하였다. 전립에는 패영(貝纓)이 달려 있고 정자에는 상모가 달려 있다. 포는 동다리로서 두루마기 비슷하며 뒤가 터졌고 주홍색 길에 붉은색 착수가 달려 있다. 화는 즉 목화를 신었다.

⑨ 이서복 : 이(吏)는 관료와 평민과의 중간에 집권기구의 말단에 속한다. 서리복은 무각평정건에 단령을 입고 조아대를 띠었다. 녹사복은 유각평정건에 조아를 띠었다. 향리가 있는데 『경국대전』에서 보면 공복으로 입을 때는 복두를 쓰고 녹포에 흑각대를 띠었으며 목홀을 들고 흑피혜를 신었다고 한다. 또 상복으로는 흑죽 방립을 쓰고 직령에 조아를 매고 피혜를 신었다고 한다.

편복

평상시 사인복(士人服)을 편복(便服)이라 한다. 조선시대의 남자는 머리를 수발하기 위하여 머리에는 망건을 쓴다. 또 그위에 을 썼을 때 흘러내리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망건에는 졸라매기 위하여 당줄이 있고 당줄을 졸라매기 위한 관자가 있었다. 그리고 망건 앞에 갓을 고정시키기 위하여 풍잠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상투를 찌고 끝마무리를 고정시키는 동곳이 있다. 또 탕건이라는게 있어 앞은 낮고 뒤는 높은데 입모의 받침이며 단독으로도 쓰이기도 했다. 관에는 대표적으로 흑립(黑笠), 즉 갓이 있는데, 갓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대우의 고저(高低), 양태의 넓고 좁음이 있었다.

사대부는 평거시에도 갓을 쓰고 사람을 만났으므로 집안에서 쓰는 관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많이 쓴 관은 정자관으로 2층 · 3층이 있었다. 그리고 유생이나 생원 사인들은 유건(儒巾)이나 복건을 썼는데 유건은 검정색 베 · 모시 · 무명으로 하고 끈을 달아 턱밑에 매었다. 복건은 검은 감으로 양옆의 끈으로 뒤로 매였다. 미혼동자가 통상례복으로 착용하기도 하였다.

의복은 옛날에 철릭 위에 입었던 답호가 조선조에서는 군신이 통용되더니 후세에서는 하급군속이나 조례의 제복이 되기도 하면서 전복이라고도 하였다. 답호나 전복은 형태가 대동소이하며 소매와 앞섶이 없으며 뒤가 터지고 양옆도 약간 터져 있다. 국말에 갑신년 때 의제 간소화로 인하여 착수의를 입고 그 위에 전복을 입었으며 사대를 띠어 사복으로 삼았다. 다시 갑오경장시에는 조신의 통상복으로 주의에다 답호를 입게 하여 국말까지 관인의 제복을 이루었다.

직령(直領)도 많이 입혀졌으며, 사대부의 편복으로 쓰여지기도 했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부터 백저포가 조선조로 넘어오면서 착수가 광수가 되지 않았나 본다. 이것이 국말에 와서 폐지되었다. 또 우리 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민속복식이 된 도포는 사인복으로 입었다. 뒤길이 한폭이 더 달려있는 것이 특징이며 세조대를 띠었다. 이 도포도 국말에 와서 폐지되고 다만 가제(家祭)의 제복으로만 착용한다. 또 창의(氅衣)라는 게 있어 사실(私室)에서 입었다. 종류는 소창의 · 대창의 · 학창의가 있었다.

옛날 중국에서 상복으로 치는 심의(深衣)가 있다. 조선조에서도 심의에 대한 숭상이 대단하였다. 백포로 만들어 의 4폭, 상 12폭을 연접하고 둥근 큰소매에 깃, 도련, 수구에 검정색 선을 두르고 복건을 썼다. 신은 화와 혜(鞋) · 이(履)로 나누어지는데, 화는 주로 가죽으로 만들다가 전(氈)으로 바뀌었다. 혜는 가죽으로 하기도 하고 울을 비단으로 하기도 하였다. 비단에 징을 박은 징신도 있다. 또 짚으로 만든 초리(草履), 삼(麻)으로 만든 미투리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서민복

신분제도가 확립되고 이에 따른 신분관념이 투철했던 조선시대에 ‘상사람’으로 불린 서민이 처한 사회적 위치와 대우는 아주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어느 봉건국가에서나 복식은 그 자체가 계급성을 띠고 있어, 이것이 질서를 표상하여 의장이 되었으며, 상하 · 존비 · 귀천의 이원적 구조에 따라 강제성을 갖게 되어 흔히 복식금제로 나타났으니, 이러한 여건 밑에서 하층계급인 그들에게 복식다운 것이 있을리 만무하였다.

그들이 착용할 수 있었던 것은 예로부터 입어 내려오던 우리 나라 고유 복식으로 그 기본구조가 되는 저고리 · 바지가 고작이었으며, 그것도 상층 사회에서와 같이 습용할 수는 없었으니, 하물며 여러 까다로운 복식금제가 붙어 있는 그들에게 사라능단 등의 비단의나 문양의(紋樣衣) · 염색의(染色衣)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이 곧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를 백의민족으로 지칭하게 된 근본이 되었으며, 또한 조선시대 복식문화의 발달을 그만큼 저해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① 관모 : 서민들은 탕건과 비슷하지만 턱이 없이 반듯하게 만든 감투를 썼는데, 원래 죽(竹)감투였다고 생각되나, 나중에는 말총이나 가족 · 헝겊 등으로 만들어 쓰기도 하였다. 또한 평랑자나 초립 등을 쓰기도 하였다.

② 의복 : 서민복의 기본을 이루는 것은 저고리 · 바지였다. 남자의 저고리도 여복과 함께 간소화 경향을 보이나 국말에 가서는 어느 정도 다시 길어지고 커지는 경향을 보였다. 바지는 주로 삼국시대의 궁고(窮袴) 형태를 변형한 사폭을 대고 있는 형태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발목 부위를 잡아매는 것이 기본이었다. 이에는 ‘다님’이라는 것이 필요한데, 근래에도 어린이용 바지에서 볼 수 있듯이 원래는 다님이 붙박이로 달려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언제부터인가 따로 치게 되었고 때로는 행전(行纏)을 치기도 하였다.

저고리 · 바지에 버선과 초리(草履)를 신었으며, 여름에는 적삼 · 고이 등도 착용하였다. 그 위에 ‘직령’, ‘첩리’도 착용하였다 한다. 그리고 9승(九升) 이상의 의복과 사라능단채견으로 된 낭자(囊子) · 호슬(護膝) · 진사대(眞絲帶) · 전피화(猠皮鞾) · 피혁혜(皮革鞋), 또는 대홍의(大紅衣)를 금하였다. 이러한 금제는 사치를 억제한다는 명목하에 역대에 자주 내린 바 있는데, 이것은 거꾸로 곧 서인복의 윤곽을 알려주는 것이라고도 하겠다.

여자 옷

여복의 주축을 이루는 것은 치마 · 저고리인데 시대에 따라 변화는 다소 있었으나 구조는 초기의 국속을 벗어나지 않았다. 조선조 여인의 머리모양은 출가녀는 얹은머리 · 쪽진머리이고, 출가전에는 땋은머리였다. 얹은머리는 두발을 땋아 머리 위로 얹은 형태인데 조선조 중기에는 매우 성행하여 폐단이 심해졌다. 이에 영 · 정조대에 가체금지령이 내려 쪽머리를 하고 예장에는 족두리로 대체하게 하였다. 그러나 발제개혁은 정조 재위 중에도 완전히 실시되지 못하고 순조 중엽에 가서야 이루어진 듯하다.

조선시대의 출가하지 않은 여자는 머리를 땋아 늘이고 댕기를 드렸다. 궁중에서는 큰머리라고 하여 어여머리 위에 떠구지를 얹었다. 어여머리는 큰머리 다음가는 예장머리였다. 또 대수(大首)는 왕비의 대례복에 하는 것으로 국말에는 적과 대용으로 사용하였다. 의복에는 저고리 · 치마를 주축으로 한 평상복과 의식용 대례복이 있었다.

궁중여복

대례복(大禮服) : 비빈복과 궁녀복으로 나누어 진다. 왕비의 대례복은 명으로부터 사여되었는데 대삼(大衫)의 제는 관이 적관이고 배자하피(霞帔)에 적문(翟紋)이 있어 이를 적의라고 하였다. 대삼은 대홍색이고 배자(褙子)는 청색이며 적계문(翟鷄紋)을 수놓은 것이다. 여기에 하피 · 홀이 첨부되었는데, 사실 명의 왕비예복에 의하면 이외에 대대 · 옥혁대 · 수 · 옥패 · 말 · 석이 첨부되어야 한다. 하피는 바탕이 청색이며 이를 고정할 도금 추자가 있었다.

그 뒤 영조 때 적의제를 보면 적의는 대홍단으로 하고 원적(圓翟)을 수놓아 51개를 배치하였다. 수구 외면에 9개의 원적을 좌우에, 그리고 뒷길에 좌우 9개씩을 수놓아 원적을 붙였고, 뒤 중앙에 1개를 첨부하고 앞에 보 밑에서부터 좌우 6개를 붙이고 좌우 일곡(一曲)해서 1개씩 총 51개를 수놓아 붙였다. 그 밑에는 별의(別衣)가 있는데 이것은 중단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 밑에 받침으로 내의(內衣)가 있는데 대홍이었다.

상(裳)이 있는데 앞 3폭은 연봉하여 짧고, 후 4폭은 2폭을 연봉하여 주름을 잡고 여미게 되어 허리를 달며, 길이의 중간과 그 밑에 용을 직금하여 스란단을 댔다. 하피는 겉을 흑단으로, 안감은 홍초로 받쳤다. 금으로 운하적문(雲霞翟紋)을 그렸는데 운하 28, 적문이 26개였다. 폐슬은 왕의 폐슬과 같고 무회(無繪)라 하였으며, 위에는 비(紕), 아래는 순(純)이라는 본색의 연이 있었다. 대대는 대홍단으로 겉을 하고 백능으로 안을 하고 녹단으로 연(緣)을 둘렀다. 그리고 혁대 · 옥패 · 수 · 말 · 석 · 규는 왕의 것과 같았다.

국말에 고종이 황제위에 오르면서 명의황후와 황태자비의 적의제에 해당하는 제도로 그 격을 높여 제정하였다. 황후와 황태자의 것은 비슷하며 다만 적문의 등수가 12등과 9등으로 되었다. 우리 나라 말엽에 황후 적의제는 적의는 바탕이 심청색이었고 적문을 12등분하여 직성하고 작은 이화꽃을 사이 사이에 직성하였다. 홍색의 깃과 도련 및 수구에 운용문을 직금하였다. 그밑에 중단을 입었는데 옥색으로 만들고 홍색선을 깃, 도련, 수구에 둘렀고 깃에는 불문을 13개를 직성하였다. 폐슬은 심청색으로 하고 적문을 3줄로 하고 사이사이에 이화(梨花)를 직성하고 아청색으로 연을 하고 운룡문을 직금하였다. 여기에 옥혁대를 띠고 또 대대를 늘이고 뒤에는 수를 늘이고 옥패를 양옆에 늘여서 옥 부딪히는 소리를 냈다고 한다. 말은 청색이고 석도 청색이며 옥곡규가 있었다.

② 상복(裳服) : 명으로부터 들어온 왕비 관복중에는 단삼(單衫) · 오아(襖兒) · 군(裙)은 상복에 속한다. 이외에도 『국혼정례(國婚定例)』에서 볼 수 있는 노의(露衣) · 장삼(長襂) · 국의(鞠衣) · 원삼(圓襂)도 상복에 속한다.

㉮ 단삼 : 중국제도로서 이에는 오(襖)와 군이 포함되어 있다. 단삼은 녹색으로 관복과 같은 원령(圓領)으로 이 안에는 오와 길고 넓은 치마를 입었다.

㉯ 노의 : 왕비의 평례복으로, 4품이상의 정처의 예복으로 조선조 초기부터 있었다. 왕비는 홍포에 315개의 적계문을 금박하고 남색의 태수를 달고 쌍봉문의 흉배를 하였다.

㉰ 장삼 : 노의 다음 가는 예복으로 왕비는 홍삼에 금박을 하고 거들지를 하였으며 흉배를 한 것으로 본다. 또 대홍대가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소례복에 속하였다고 보며 5품이하의 부인의 예복이었으며 조선조말까지 보이다.

㉱ 국의 : 친잠복으로 중국에서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성종 12년(1481)에 친잠례에 따라 친잠을 후원에서 행하였는데 이때는 상색(桑色)으로 물들여 하였고 24년에는 명부들의 조잠복을 아청으로 하기도 하였다. 왕비는 이때도 쌍봉문의 흉배를 하였다.

㉲ 원삼 : 우리 나라에서는 여러 가지 예복이 있었으나 오랜 시일 속에 국속화되어 조선조 중기가 되면서 집약되어 원삼이 되었다고 보며, 영조대에 와서는 원삼이 제도화 되었다. 왕비는 홍원삼에 쌍봉문 흉배를 달았으나 국말 황후의 것은 황원삼에다 오조룡의 4개의 보를 달았다.

③ 평상복 : 저고리 · 치마가 평상복이다. 저고리는 궁중에서 겹격음(裌隔音), 즉 겹막음 또는 겻막이라고 하여 회장저고리이다. 치마는 수보로(繡甫老)라고 『악학궤범』에 나와 있는데, 상을 보로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는 상을 말하는 것으로 원래 몽고어에서 왔으며 보리(寶里)라 하여 난(襴)이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오늘날의 스란치마라고 본다. 궁중에서 입는 평상복 색은 주로 남치마가 제일 많고 저고리는 왕비는 주로 송화색이었다고 본다.

반가여복

여자의 기본구조는 삼국시대 이래 변함이 없다. 다만 둔부를 내려가던 저고리 그리고 허리에 띠를 띠던 것이 몽고의 영향으로 길이가 짧아지고 띠가 없어지며 고름을 매게 되었다. 이 구조는 국속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 외에 존자 의복으로 말군이 있었다. 통 넓은 바지같이 생겼고 뒤가 터져 치마 위에 입을 수 있었다. 외출시 말을 탈 때 입었다.

① 반가(班家)예복 : 원삼 · 활옷 · 당의에다 치마에는 스란 장식이 있고 속에는 무지기를 입었다. 원삼은 녹색원삼에 화문을 금직 또는 금박하였고 긴 띠를 매어 뒤에 늘였다. 활옷은 공주 · 옹주의 예복으로 상류층에서 혼례예복으로 사용하였으며 대홍색 바탕에 장수와 길복을 기원하는 무늬를 수놓은 것이다. 또 당의는 소례복으로 좁은 소매에 거들지를 달고 왕족 이하 모두 입었다. 녹색당의가 보통이나 자색, 백색도 있었다.

② 스란치마 · 대란치마 · 웃치마 : 스란치마나 대란치마는 단을 따로 만들어서 금직이나 금박을 하여 덧대는데, 한줄을 대면 스란치마라 하고 두줄을 대면 대란이라 하였다. 전행웃치마는 궁중에서 쓰던 것으로 세가닥으로 주름을 끝까지 잡아서 한 허리에 달아서 예복용으로 치마위에 입었다. 사대부가에서는 계급에 따라 자색이나 또는 청색으로 지금의 앞치마 같이 뒤는 여며지지 않는 웃치마를 만들고 화문의 금박을 한 단을 무릎 높이에 댄다. 예복의 상(裳)이다. 치마 밑에는 옷맵시를 부풀리기 위하여 무지기를 입는다. 이는 모시 12폭으로 삼합(三合) 또는 오합으로 층층으로 주름을 각기 잡아서 한허리에 단다.

③ 평상복 : 평상복은 예복 밑에도 입었고 일상 생활에서도 입어 왔던 저고리 · 치마이다.

㉮ 저고리의 변천 : 조선조 초기의 유물로 1560년(명종 15) 경의 것이 있는데 특색을 보면 저고리 길이가 매우 길며(58㎝), 따라서 옆이 아래로 퍼져 곁막이가 달려 있다. 화장도 매우 길며 통수이며 깃은 겉깃과 안깃이 모두 지금의 안깃과 같다. 도련도 매우 둥글다. 깃과 끝동, 섶, 곁대가 모두 길색과 다른데 아마도 고름은 없었으나 같은 색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중기의 것으로 영조 8년(1732)에 죽은 완산(完山) 최씨(崔氏)의 저고리가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저고리 길이는 47.5㎝로 많이 짧아졌다. 깃은 목판깃이되 당코깃 형식으로 되어 있다. 고름은 깃과 같은 감으로 좁고 짧다(2-37.5㎝).

조선조 후기의 저고리로서 청연군주(淸衍郡主)의 것이 있는데, 저고리 길이가 많이 짧아졌다(25㎝). 화장은 여전한데 배래선이 수구를 약간 좁힌 곡선이 되었다. 품도 꼭 맞도록 되었다. 깃 · 섶 · 고대 모두 좁아졌으나 곁마기는 다소 커졌다. 동정나비도 좁아졌고 고름은 너비는 전대와 같으나 고름길이는 늘어났다. 조선말기의 것으로 양헌수(粱憲洙) 장군 부인 저고리를 보면 노년기의 것임에도 저고리 길이는 같다. 적어도 50년 후의 것으로 보이며, 그러고 보면 저고리 길이가 짧아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깃이 둥근깃으로 바뀌었다. 고름은(2.5-40㎝) 길어졌다. 조선조는 저고리가 단소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 치마의 변천 : 우리 나라의 치마는 큰 변동이 없었다. 유물을 통하여 검토해 보면 초기것으로 1560년경의 유물로 치마 길이가 90㎝의 누비치마인데, 길이는 워낙 사람이 작았고(미이라로 봄) 더욱이 저고리 길이가 길었음으로 가슴까지 치켜 입지는 않았음으로 보통이라고 본다. 치마감 1폭이 약 32㎝정도로 12폭으로 전폭이 362㎝이다. 치마의 형태는 별 다름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놀라운 것은 누비솜씨로 사람손으로 했다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곱고 정교하다.

16세기 연간의 청주(淸州) 한씨(韓氏)의 대란 치마가 있다. 길이는 127㎝로 의례용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란은 직금으로 되어 있으며 포도동자무늬이고 치마단 가에는 금직이지만 좁은 약 4㎝ 정도의 단이 있다. 단국대학교 민속박물관 소장이다. 또 16세기의 것으로 은진(恩津) 송씨(宋氏) 치마와 원주(原州) 원씨(元氏) 치마가 단국대학교 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모두 홑치마이고 9폭 정도로 앞 3폭은 덧주름으로 발등까지 내려오게 하고 뒤는 길게 끌리게 되어 있다. 어떻게 이런 디자인을 할 수 있는지 놀랍다.

중기에는 남이흥(南以興) 장군 부인 치마가 있는데 92㎝ 길이에 1폭 너비 33㎝로 11폭 치마를 하고 있다. 또 완산 최씨 치마가 있는데 이 치마 단처리가 특이하다. 즉 치마단을 같은 감으로 곧은 올로 겉은 0.2∼0.3㎝ 남기고 안으로 넘겨 감쳤다. 후기에는 청연군주의 치마가 많이 있는데 길이는 113∼135㎝, 폭은 325∼398㎝로 다소 좁기는 하지만 큰 차이는 없다. 치마길이가 길어진 것은 저고리 길이가 짧아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 속옷 : 속옷으로는 저고리속에 입는 속적삼 속저고리가 있고, 치마속에 입는 단속곳 · 바지 · 속속곳 · 다리속곳이 있고, 외출용의 너른바지가 있다.

ㄱ. 속적삼 : 여름것은 여름감으로, 겨울에는 겨울감으로 입고, 겨울에는 그 위에 속저고리로서 약간 작게 하여 입었다.

ㄴ. 속곳 : 바지 위에 입는 것으로 그 위에 치마를 입는데 양가랭이로 되어 넓으며 밑이 막혀있다. 옷감은 고급으로 했다.

ㄷ. 바지 : 밑이 터지고 바지 부리는 좁은 것이다. 여름에는 홑으로 하며 고쟁이라고 하였으며 또 고쟁이에 하반신만 고운 감을 덧대어 모양을 낸 중두리라는 것도 있다.

ㄹ. 속속곳 : 바지 밑에 입는 것으로 명주로도 했으나 일반적으로 목면으로 많이 했는데 형태는 단속곳과 같고 다만 약간 길이가 짧다. 속속곳에 넓은 가랭이를 바지 가랭이 속에 넣어서 빵빵하여 옷입은 모습이 푸하게 되었다.

ㅁ. 다리속곳 : 가장 밑에 입었으며 홑겹으로 허리를 달아 입었다. 매일 갈아 입는 것으로 지금의 팬티이다.

ㅂ. 너른바지 : 상류층에서 개화기 때 외출할 때 단속곳 대신 입는 겹으로 된 단속곳형인데 여밈이 뒤로 되어 있다. 입은 모습이 풍신하고 부드러워서 맵시 있어 보인다.

ㅅ. 허리띠 : 가장 밑에 입는 것으로 저고리 길이가 짧아졌을 때 허리가 미끄러 내려오지 않도록 그리고 살이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허리에 감 아 맨 것이다.

서민여복

전 인구의 8 · 9할이 넘는 농민들의 부녀들은 길쌈노래에도 있듯이 침선방적으로 일생을 마치고 손톱 · 발톱이 닳도록 일하면서도 평생에 기라(綺羅) 한번 걸치지 못하였다. 그래도 공 · 상인 중에 부를 누릴 수 있었던 일부 상인층 부녀자들은 그 사치가 대단하여 나라의 복식금제와 더불어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반인계급과는 옷의 종류와 착의법에서 차이가 있었다.

여복에서 포제는 생각지도 못하였으며, 쓰개장옷 · 천의에 한했고, 저고리 · 적삼 · 치마 · 바지 · 속곳 · 고쟁이 · 짚신 등이 고작이었다. 삼회장저고리는 입지 못하였으며 치마도 오른쪽으로 여미어 입었다. 특히 하속배들은 ‘거들치마’라 하여 치맛자락을 바짝 치켜 여미어 입어 속옷이 바깥에 보이게 되었고 또한 폭도 좁고 길이도 짧은 ‘두루치’를 흔히 입었다. 그러나 혼례 때만은 인륜의 대사라 하여 특혜가 있어 반가에서와 다름 없이 족두리 · 원삼을 입을 수 있었다.

개화기 및 일제강점기의 옷

개화기에서는 그간 거의 반세기동안 겪어야 했던 격동기와 수난기였으므로 너무도 엄청난 변모였다.

남자 옷

개화기의 남자 복식은 관복의 간소화와 양복의 도입이 특징이다. 1884년(고종 21)에는 갑신의제개혁(甲申衣制改革)으로 갑오경장보다 10년이 앞선 것이다. 이때는 흑단령에 흉배를 달도록 했는데 소매는 좁히고 사복도 도포 · 창의 등을 폐하고 착수전복에 사대를 하였다. 갓도 챙을 좁히고 복식 현대화의 첫걸음을 디뎠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과거의 조복 · 공복 · 상복도 자취를 감추고 흑단령 하나면 대례복이 되었다. 소례복으로는 주의에 답호를 걸치고 목화를 신도록 하였다. 이듬해에는 답호도 없애고 주의 일색이 되었다. 1900년에는 완전히 양복화 하였다.

여자 옷

개화기에 여성들을 개화시킨 것은 기독교의 전래였다. 서양여성의 간편한 옷차림을 접한 전도부인들은 순색의 긴 저고리에 짧은 통치마를 입고 활보하였다. 또 외국유학에서 돌아온 유학생들은 양말에 구두를 신고 통치마를 입어 화제가 되었는데(1907년경) 신여성이란 명칭도 탄생하기 전이었다. 1899년 윤고라(尹高羅)는 외국에서 양장을 하고 돌아왔으며,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고종 황비인 엄비(嚴妃)도 양장을 하고 기념사진을 찍은 모습이 남아 있다. 또 미국 유학을 하고 1900년 의사가 되어 돌아온 박 에스트가 우아하고 검소한 양장 모습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 그후로 양장과 양산이 많이 쏟아져나와 유행을 이루었다.

여기에서 이 당시 여자 한복의 변천을 보면 저고리의 소매통이 곡선이 두드러졌고 저고리 길이가 활동하기 편하도록 길어졌다. 그리고 고름은 너비도 넓어지면서 길이도 길어졌다. 치마는 긴치마가 짧아져서 통치마가 되었는데 속옷이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버선이 없어져 가고 양말에 구두를 신는 것이 대유행이었다. 속옷이 간소화되어 서양식 속옷을 많이 입게 되었다. 그런데 일제 말엽 수난기에 1941년에 대동아전쟁이 일어나면서 남자들에게는 국민복이라고 하여 국방색의 양복을 입도록 강요하였고 여자에게는 일본여자 노동복인 몬뻬라는 바지를 입게 하였다. 이는 고구려 시대의 바지인데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돌아온 것이 확실시 된다.

세기 후반의 한복 변천

구한말 바지저고리에 조끼와 마고자가 더해지고 소매가 넓은 도포가 두루마기로 대체되었던 남자 한복은 20세기 후반에도 같은 양식을 유지하여 왔다. 다만 20세기 후반에 들면서 서양복의 영향으로 상의의 길이가 재킷과 같이 길어졌고, 1990년대에 들어서는 바지의 대님과 옷고름 대신 매듭단추를 단 바지 저고리 형의 생활한복이 등장한 정도이다. 반면 여성의 한복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53년 정도에 나일론이 소개되고 1960년대에 새로운 화학섬유의 생산은 우리 나라의 의생활의 일대 전환기를 이루었다. 우리의 복식은 외국 모드의 직접적인 영향 앞에 개방되었으며 동시에 양복화가 가속되고 있었다.

아직은 한복과 양복이 공존하고 있는 실정었지만 젊은 여성들은 양장을 선호하였고, 많은 계층에서는 여전히 한복을 고수하였다. 다만 그 소재는 화학섬유로 바뀌어 갔으며, 서양복의 영향으로 치마와 저고리를 동색(同色)으로 만들어 입는 것이 유행이었다. 특히 1950년대와 1960년대 초에는 생활개선운동의 하나로서 한복을 개선하고 현대화하여 실용복으로 정착시키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고름보다는 단추나 브로치를 사용하는 것이 유행이었고, 사회활동을 하는 여성들은 종아리를 보일 정도로 짧게 착용한 통치마 · 저고리를 애용하였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궁중 복식에 관심이 집중되면서 한복 치마에 금박이 보이기 시작하고, 사회가 안정되어 감에 따라 저고리 길이는 더욱 짧아졌다. 저고리의 깃 · 섶 · 동정이 좁고 가늘어진 반면, 소매통은 여전히 둥글고 폭이 있는 것을 즐겼다. 깃 길이는 길어져 깊이 파인 V자형으로 목이 많이 드러나도록 하였다. 소재는 1960년대 후반에는 합성섬유의 개발로 인해 합섬섭유로 만든 한복지나 양장지를 소재로 한 한복이 많이 등장하였다.

한편 섬유산업의 발달로 기성복의 기틀이 잡히면서 한복은 일상실용의 기능을 상실하고 예복화되었다. 1970년대에 저고리의 형태가 더욱 단소화되었으며 1978년부터는 고름을 길게 매는 것이 유행되었다. 1975년경부터 A-line을 만들기 위해 치마는 고어드 스커트를 응용하는 재단법이 시도되었고, 길이는 신발을 가릴 정도로 길어졌다. 젊은 층에서는 한복을 명절이나 행사에 주로 입게 되었다. 따라서 실크류 둥 한복용 고급소재가 주로 사용되였다.

예복으로서 한복은 장식성이 더해지기 시작하여 1970년대에는 양어깨, 치맛단 둘레와 자락, 저고리 도련에까지 금박이 확대되었다. 장식용 재료와 방법도 다양해져서 수, 아플리케, 색조화(色調和), 무늬 오려붙이기 등이 등장하고, 색채는 더욱 다채롭고 원색적이며, 문양은 더욱 대담하고 대형화되었다. 각종 금박과 자수는 물론 꽃무늬 날염 등이 등장하여 한복에 화려함을 더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1980년대초까지 계속 되었으나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게임 개최를 기점으로 전통에 대한 관심의 증가와 함께 전통미를 살린 한복이 재등장하였다. 소재는 얇고 부드러운 노방 · 주아사 · 명주 등이 주로 유행하였다.

1987년부터는 금 · 은박이 줄어들고 중간색의 한복을 선호하게 되었다. 즉 전통한복으로 복고하는 경향을 보이며 자연색을 주조로 한 전통적 색 조합과 디자인을 선호하되, 개인의 개성에 따라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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