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화(鞾)라고도 하며, 이(履)와 더불어 우리 나라 신의 대표적인 종류의 하나이다. 화에 대하여 ≪석명 釋名≫ 석의복조(釋衣服條)에는 “화는 혜(鞋)이니 양족(兩足)이 각각 일혜(一鞋)로 기마에 편리한 신이며 조무령왕(趙武靈王)이 처음 사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수서 隋書≫ 예의지(禮儀志)에서는 “습복(褶服)에 화(靴)를 쓰니 화는 호복(胡服)이라, 일하는 데 편리하므로 융복에 사용한다.”고 하였고, 후당마고(馬稿)의 ≪중화고금주 中華古今注≫ 상권에는 “짧은 신목에 황피(黃皮)를 사용하며, 한거(閑居)할 때 신는 신발로서 원래 짧았던 신목을 길게 고쳐서 동여매고 여기에 전(氈)과 조(絛)를 더하였다. 또한, 승마에 편리하기 때문에 문무백관이 모두 신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심괄(沈括)의 ≪몽계필담 夢溪筆談≫ 권1에도 활동에 편한 호복의 신으로 북조(北朝) 이래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착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화는 호복에서 유래된 신발로 조무령왕이 사용한 화는 신목이 짧았다.
이것을 뒤에 마주(馬周)가 신목을 길게 고쳐서 신목에 동여매게 하였고 이것이 화대(靴帶)로 발전된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 상대의화는 ≪구당서 舊唐書≫ 권29 지제(志第) 9음악 2에 악공이 적피화(赤皮靴)를 신었다는 기록으로 그 존재를 알 수 있다. 실제로 쌍영총 후실 북벽 벽화에도 벗어놓은 화를 볼 수 있다.
동벽 벽화 9인행렬도 중 3인도 화를 착용하고 있다. 무용총 무용도 중에도 여인이 백화(白靴)를 신고 있는 모습이 있다. 신라에서는 화를 ‘세(洗)’라 하여 오늘날의 ‘신’과 비슷한 음으로 불렀다. 또, 경주 단석산 인물암 공양상(供養像) 중에도 화를 착용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화는 화대가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며, ≪삼국사기≫ 권33 복색조에는 화대의 재료로 은문백옥(隱文白玉)·서(犀)·유(鍮)·철·동 등의 기록이 있어, 화대의 귀금속장식이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송(宋)의 신종(神宗)으로부터 화가 보내졌고, 관복개정시에 흑피화로 제정되었다.
조선시대는 인조 때 왕비 법복에 흑피화를 신었으며, 세종 때에는 왕세자 공복에 흑화를 신은 기록이 있다. 유물로는 조선 말 순종이 어렸을 때 신은 목화가 있다. 또한, 1품에서 9품까지 문무백관의 공복에 흑피화를, 당상관은 상복(常服)에 협금화(挾金靴)를 신었다는 기록이 ≪경국대전≫의 장조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 말기에는 흑피화 대신 목화가 많이 착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