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이나 동·쇠 등으로 만드는데 여러 가지 무늬를 장식하여 식리(飾履)라고도 불린다. 대개 얇은 금동판을 이어서 만들었고 바닥에는 굵은 못이 박혀 있으며, 앞창이 약간 들린 형태이다. 이러한 종류의 금속제 식리는 가야·백제와 신라의 고분 및 일본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백제와 신라의 고분에서 발견된 금동리의 형태를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백제의 것으로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동제 봉황문식리(金銅製鳳凰文飾履)가 있다. 이것은 무령왕과 왕비의 금동리로 크기는 이(履)의 길이 약 35㎝, 안쪽 밑바닥의 길이 40㎝, 측면의 연고(緣高) 8.9㎝, 안 밑바닥의 너비 11.2㎝ 등으로 되어 있다.
형태는 앞의 코머리가 쳐들려 있고, 바닥에는 날카로운 못이 박혀 있다. 신 전체의 바닥과 양 옆에 세운 판은 모두 은으로 되어 있다. 그 위에는 인동당초문(忍冬唐草文)을 투각(透刻)한 금동판이 씌워져 있다. 그런데 인동당초문 사이사이에는 다시 6각형의 구획을 짓고 그 안에 봉황이 투각되어 있다.
한편, 신라의 금동리는 백제와 달리 여러 고분에서 유물이 출토되고 있는데, 기본적인 형태는 대체로 같으나 만듦새나 문양은 고분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경주 금관총(金冠塚)에서 출토된 예는 길이 30.8㎝, 너비 10.5㎝, 높이 7.8㎝이다. 신바닥은 1매(枚)의 얇은 구리로 만들었고 좌우족이 발 모양대로 만들어 좌우이형을 이루고 있다.
신의 앞부리는 둥근 감이 있는 특수한 형태이며, 좌우후는 3매의 동판을 바깥으로부터 안으로 구부려 밑판의 연(緣)을 싸고 서로 잇게 해서 외측을 조립하였다. 또한, 외측 전면에는 T자문이 투각되어 있으며 밑판의 외부 전면에는 1㎝ 가량의 소원형영락(小圓形瓔珞)이 장식되어 있는데, 그 수는 87개 정도이다.
금속제이기 때문에 무겁고 단단하여 비실용적이어서, 죽은 뒤 염습용으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그러나 염습용 신발로만 보기에는 지나치게 견고하고 정밀하여서 단순히 장의용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지배자를 신격화하기 위하여 복식(服飾)에 필요 이상으로 장식을 가했다.
상징성을 부여했던 고대인들이고 보면 금동리도 이러한 고대인들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평상시에 사용했다면 특별한 제전이나 의식 때 잠시 신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