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직공도」는 중국 양나라 원제 재위 연간 소역이 백제사신의 행차를 그린 문서이다. ‘백제사신도’라고도 한다. 526년∼536년 무렵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것이다. 일부가 소실되어 현재는 12국의 사신 그림과 기록이 남아 있다. 사신의 모습과 복식은 각국의 특색을 드러내고 있으며, 그림에 따르는 기록은 그 나라의 상황과 중국과의 왕래 사실을 서술한 것으로, 『양서』 제이전의 서술과 부합한다. 특히 삼국시대 백제 사신의 모습과 그에 대한 기술은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자료로서 우리나라 학계의 주목을 받아 왔다.
526∼536년 무렵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것이다. 일부가 소실되어 현재는 12국의 사신 그림과 기록이 남아 있는데, 그 중 왜국조(倭國條)의 기록에 해당하는 부분은 후대에 왜국과 탕창국(宕昌國)에 대한 기록이 합쳐져 전해진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13국에 대한 기록인 셈이다. 사신의 모습과 복식은 각국의 특색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림에 따르는 기록은 그 나라의 상황과 중국과의 왕래 사실을 서술한 것으로, 『양서(梁書)』 제이전(諸夷傳)의 서술과 부합되고 있다. 특히 삼국시대 백제 사신의 모습과 이에 대한 기술은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기 때문에 일찍부터 우리 나라 학계의 주목을 받아 왔다.
백제국사(百濟國使)에 관한 부분은 사신도와 7행 160여 자의 짧은 글로 구성되어 있다. 사신도에 그려진 백제 사신은 발을 약간 왼편을 향하여 나란히 하고 있다. 단아한 용모에 관(冠)을 쓰는 좌임(左衽)의 대수포(大袖袍)를 무릎을 약간 덮을 정도로 착용하고 그 아래에 바지를 입었으며, 검은 신을 신고 양손은 모은 채 가리고 있다. 사신도에 따르는 기록은 백제가 중국과 통교한 내용이 전체의 3분의 1로서, 『양서(梁書)』의 기록과 구성 · 내용이 대체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몇 가지 중요한 기사를 담고 있다.
첫째, “진(晋)나라 말에 고구려가 요동(遼東) · 낙랑(樂浪)을 차지하고, 또한 백제는 요서 진평현(遼西晋平縣)을 차지하였다(晋末駒麗略有遼東樂浪亦有遼西晋平縣)”라는 기사이다. 종래에는 당시 국제정세로 보아 백제가 요서를 점령했다는 구절을 회의적으로 받아들이거나, 혹은 이를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고 낙랑 또한 요서 진평현을 차지하였다”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 기록은 『양서』 백제전과 『송서(宋書)』 백제전에 똑같이 전해지고 있으므로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요서지역은 땅이 척박하고 인구가 희소하였던 까닭에 전연(前燕) · 전진(前秦) · 후연(後燕) · 북위(北魏) 등이 군사적 대치를 하던 경우라도 중심지를 제외하면 전면적인 지배력을 행사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최근에는 백제가 진나라 말에 일시 요서지방을 점령하였다고 보거나, 요서지방에 백제의 무역 전진기지가 있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둘째, 백제가 웅진 시대에 22 담로(擔魯)에 자제(子弟) · 종족(宗族)을 파견하였다는 기사로서, 이는 백제의 지방제도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셋째, 백제에 부속된 나라로 반파(叛波), 탁(卓), 다라(多羅), 전라(前羅), 사라(斯羅), 지미(止迷), 마련(麻連), 상사문(上巳文), 하침라(下枕羅) 9개의 국가를 열거하고 있다. 이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으며, 주로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실려 있다.
반파는 고령(古靈)의 대가야(大加耶)이며, 탁국은 대구인 달구벌(達句伐)로 비정하기도 하고 최근에는 백제의 진출로와 관련하여 내륙지역인 대구 경산보다는 탁순국(卓淳國)인 창녕으로 비정하는 것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다라는 합천(陜川)으로 추정되며, 전라는 만약 ‘앞라’로 읽을 수 있다면 안라(安羅) 즉 아라가야(阿羅加耶)인 함안의 세력을 가리킨다 할 수 있다. 마련은 모루(牟婁)와 마찬가지로 광양(光陽) 혹은 장흥(長興)지역, 기문은 남원(南原)을 중심지로 하고 그 북방 임실(任實)까지 포함한 일대를 말하며, 지미는 『진서(晉書)』 장화전(張華傳)에 나오는 신미국(新彌國)의 다른 이름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하침라는 제주도 또는 강진(康津)으로 보기도 한다. 즉, 9소국 중 반파 · 탁 · 다라 · 전라 등은 가야의 제소국(諸小國)을 의미하며, 지미 · 마련 · 상기문 · 하침라 등은 영산강과 섬진강 일원에 산재한 여러 소국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양직공도가 6세기 초반의 사실을 담고 있다면 백제는 섬진강을 넘어 다른 지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매우 강대한 나라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라이다. 만일 사라가 신라(新羅)라면 신라가 당시 백제에 부용(附庸)하였다는 말이 되는데, 현재의 역사상식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신라가 백제와 협력관계를 유지하기 이전에는 고구려에 의존하여 중국에 사신을 보냈고, 고구려 세력권에서 이탈한 이후에는 백제에 의존하여 중국에 사신을 보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중국에서는 실제와 상관없이 신라를 백제의 부용국으로 인식하였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신라를 대국의 사신으로 따라온 소국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9소국 중 기문과 탐라 정도는 백제에 부용했다고 서술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실제 나머지 소국들의 경우 백제문화의 영향은 받았으나 그 세력권으로 들어와 부용화한 지역은 아니다. 그러므로, 9국이 백제를 부용했다는 것은 백제국 사신에 의해 사실과 다르게 전해지고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양직공도에서 나타나는 백제는 한반도 남부 지역을 대표하는 나라임을 강조하여 국제적 지위를 인정받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주변국가에 대한 영토확장 내지 영향력 확대의 야심을 드러내고 우월의식 특히 신라와의 대항의식을 대외적으로 과시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 당시 무령왕(武寧王)은 영산강과 섬진강 유역 및 가야 접경지역에 대한 진출을 시도하였고, 더욱 확대해가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이 양직공도의 백제국사도(百濟國使圖)는 6세기 초 웅진(熊津) 시대의 백제사(百濟史) 연구, 특히 백제의 대외관계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현재 중국의 남경박물원(南京博物院)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대만 국립 고궁박물원이 소장하고 있는 ‘왕회도’(폭 238.1㎝, 높이 28.1㎝)는 양직공도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하다. 이 그림은 1995년에 처음 공개되었는데, 현재 당나라 때의 화가 염립본(?∼673)이 양직공도를 모사한 것이라는 견해와 당 태종(太宗) 때 중국에 온 주변 23개국의 사신을 그린 것이라는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고구려 · 백제 · 신라 3국의 사신 모습을 세밀하게 그리고 채색하였기 때문에, 양직공도와 더불어 당시 3국의 복식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