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처음으로 우리 나라에 선보인 것은 고려 후기인 1370년(공민왕 19) 5월, 명나라 태조후(太祖后)인 효자황후(孝慈皇后)가 왕비에게 적의(翟衣)와 함께 칠휘이봉관(七翬二鳳冠)을 보내오면서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403년(태종 3) 11월, 명의 사신 황엄(黃儼)이 왕의 면복(冕服)과 함께 가지고 온 왕비예복인 대삼(大衫) 가운데 주취칠적관(珠翠七翟冠)이 들어 있었다.
이후 수차 보내온 왕비예복의 관제(冠制)는 모두 이와 같은 것이었는데, 휘(翬)나 적(翟)은 치속(稚屬)으로서 우리 나라에서는 그저 적관으로 통하였다. 태종 때에 보내온 적관의 물목을 보면, 그 수식물로서 여러가지 모양의 진주 4, 260과(顆)가 있었다.
이 안에는 두양대주(頭樣大珠) 14과, 대양주(大樣珠) 47과, 일양주(一樣珠) 350과, 모란엽(牡丹葉) 36엽, 양화빈(穰花鬢) 2개, 적미(翟尾) 7개, 구권(口圈) 1부(部), 화심신(花心莘) 2부(副), 점심발산(點心撥山) 1좌(座)가 들어 있었다.
또 금붙이 1부(副)에는 누사금적(纍絲金翟) 1대(對), 금잠(金簪) 1대, 누사보전화(纍絲寶鈿花) 9개가 들어 있었으니 그것이 얼마나 호화찬란한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선조실록』에 기록된 선조 35년 7월 인목왕비(仁穆王妃) 가례(嘉禮) 때에는 왕비 수식(首飾)을 국속(國俗)에 따라 마련하고 있다.
이것은 임진왜란 관계로 적관을 실진(失眞)하였기 때문이다. 이 이후로는 명나라로부터 적관을 가져온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적관의 사용은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되어 제정한 관복 중에 황후는 구룡사봉관(九龍四鳳冠), 황비(皇妃)는 구적관이정(九翟冠二頂), 황태자비는 구휘사봉관(九翬四鳳冠)으로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있는 바를 그대로 옮긴 것으로 그 실현을 보지는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