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죽에서 털을 제거하고 유성(鞣成)한 것은 유피(鞣皮)라 하며, 날가죽과 유피를 총칭해서는 피혁(皮革)이라 하고, 털이 붙어 있는 채로 유성한 것을 모피(毛皮)라 한다.
벗겨낸 가죽을 그대로 방치해두면 곧 부패하지만, 적당한 유제(鞣劑)로 처리하여 유피로 만들면 물에 젖어도 부패하지 않고 건조시켜도 딱딱해지지 않으며, 내수내열성(耐水耐熱性)을 얻어 각종 장구(裝具)의 재료로서 우수한 성질을 가지게 된다. 이 유성기술은 인류가 터득한 가장 오래된 기술 중의 하나이다.
구석기시대에는 수렵을 해서 얻은 짐승의 가죽에 지방을 바르고 문질러서 연하게 하는 아주 소박한 유유성법(油鞣成法)을 알게 되고, 그 뒤 불을 이용하여 동굴 속에서 짐승의 가죽을 연기에 그을리는 연기유성법(煙氣鞣成法)을 생각해냈을 것으로 추측된다.
상당히 세월이 흐른 뒤에는 잿물에 가죽을 담그면 털이 빠진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가죽에 초근목피의 침출액(浸出液)으로 염색을 하면 식물성 탄닌이 유성효과를 주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천연으로 산출되는 백반(白礬)은 강한 수렴성(收斂性)으로 유성효과를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리하여 신석기시대 말기에는 탄닌유성·기름유성·연기유성·백반유성법 등이 알려져 있었다. 한편, 몽고의 유목민 사이에서는 동물의 뇌장(腦漿)이나 골수로써 유성하는 독특한 방법이 알려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유성법들은 각지에 전파되고 전승되어오는 가운데 점점 진보하여 유피의 생산이 증대되고, 복식(服飾)·무구(武具) 등과 그 밖의 각종 가구나 장식품 등에 널리 이용되게 되었다.
유피의 원료, 곧 원피(原皮)는 주로 소·말·돼지·양·산양 등 포유동물의 가죽이 이용되었으나, 타조와 같은 조류나 악어·도마뱀·뱀 등과 같은 파충류의 가죽도 이용되었다.
우리 민족은 북방기마민족에 속하며 그 의복도 한대성 의복, 곧 북방호복계통의 의복에 속하므로, 수렵시대에는 어한(禦寒 : 추위에 언 몸을 녹이거나 추위를 막음)을 위하여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 관습은 ≪이계집(耳溪集)≫의 “적구피(赤狗皮)를 몸에 걸쳤으며, 이 피의(皮衣)를 여름이나 겨울이나 입었다. ”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함경도나 제주도에 오랫동안 전승되어 왔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가죽옷은 농경생활을 하게 되면서부터는 포직물·견직물·모직물이 발달하게 되어 쇠퇴하고, 가죽은 의복의 주재료로서가 아니라 부분재료로서 쓰이게 되었다. 그 용도도 띠·신발류, 의복의 부분장식, 기타 무구(武具)·깔개 등 다양해졌다.
조선시대에는 중국으로부터 난모(煖帽)가 전래되었고, 남녀가 난모 쓰기를 좋아하여 한말까지 애용되었는데, 그 재료가 주로 가죽이었다. 난모는 이엄(耳掩)이라 하고, 그 명칭도 형태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불렸다.
≪경국대전≫의 규정으로는 당상관은 초피이엄(貂皮耳掩), 당하관은 서피이엄(鼠皮耳掩)이었으나 남녀·귀천을 가리지 않고 초피만을 찾았다.
명종 때는 당하관 및 사족(士族)은 서피·왜산달피(倭山獺皮), 제학관원(諸學官員)·군사(軍士)·서얼(庶孽)·이서(吏胥)는 적호피(赤狐皮)·향산달피(鄕山獺皮), 공상(工商)·천례(賤隷)는 산양피(山羊皮)·구피(狗皮)·묘피(猫皮)·지달피(地獺皮)·이피(狸皮)·토피(兎皮)이며, 천여인(賤女人)의 모관(毛冠)·차수(遮首)도 공상·천례와 같다고 하여, 가죽의 사용을 신분에 따라 규제하는 계칙이 있었다.
이로써 당시에 사용되던 가죽의 종류가 다양하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