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의미로는 조선 말기에 도포(道袍)·창의(氅衣) 등의 제도가 없어지고 일반 사서인(士庶人)이 착용하기 시작하여 오늘날 입혀지고 있는 포제(袍制)를 말한다.
소매는 좁고 직령교임식(直領交衽式)이며 양 옆에 무를 달아 옆을 막고, 길이는 발목에서 20∼25cm 정도 올라오게 한다. 이것은 우리 민속의 후리매·쿠리매 등의 계통을 이은 하서인(下庶人)의 포제였으나, 그 간편함 때문에 일반화된 것이다.
두루마기란 ‘두루 막혔다’는 뜻이고, 한자어로는 ‘주의(周衣)’라고 한다. 일부에서는 그 어원이 몽고어의 쿠루막치(xurumak○i)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다.
몽고복과 비슷한 점이 있다 하여도 그 원류에서 볼 때 고구려 이래의 우리 전통의 포제에서 나온 것이다. 고구려 포제에는 당시의 양식으로 선(襈)이 있고 띠를 둘렀는데, 오늘의 두루마기에는 선이 없고 고름으로 되었을 뿐 별 차이가 없다.
백제·신라의 포도 두루마기와 비슷하였을 것으로 보는데 양나라의 <직공도 職工圖>에 나오는 백제 사신도(使臣圖), 당나라 이현묘(李賢墓)의 외국사신도에 나오는 신라 사신도에는, 저고리보다 약간 길며 소매가 넓은 포를 입고 있어 삼국이 같았음을 알 수 있다.
고려에 내려오면 전기에는 백저포(白紵袍)가 일반적인 포로 입혀졌다. 여기에도 띠를 두르고 있어 옛 흔적을 지니고 있는데, 중기 이후 몽고의 질손(質孫)이 일반 국민에게 강요되자 전기의 백저포는 약간 변용된 것 같다.
당시의 유물인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서산 문수사 불상복장포(瑞山文殊寺佛像腹藏袍)를 보면 애초의 포형은 몽고계통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그 전체적인 형태는 우리 두루마기에서 많이 벗어나는 것은 아니며, 여기 무가 생성되어 활동에 편리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과 비슷한 포형이 조선 초기에는 직령포(直領袍)의 형태로 발전하는데, 이 직령포가 후기의 두루마기의 원형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 많은 직령포가 개량 발전되고 있는데 그 중 1530년(중종 25)대의 광주 이씨(廣州李氏)의 겹주름포[裌注音袍]는 그 형태에서는 문수사 불상복장포의 계통이고, 옆 겨드랑 밑 무가 두루마기보다는 여유가 있다.
이 뒤를 이어 옆주름이 없어지고 오늘의 두루마기와 같이 된 것이 1583년(선조 16)을 하한대로 보는 고림군종가(高林君宗家)에 전하여오는 직령포와 장군 김덕령(金德齡)의 질부 장흥 임씨(長興林氏)의 겹직령포이다.
이는 김덕령의 두루마기와 같은 시기의 것으로 오늘의 두루마기와 포폭(布幅)의 처리 문제 등 조금 다른 점은 있어도 별차이가 없다. 전라남도 광주 충장사(忠壯祠) 소장 김덕령의 두루마기는 소매가 좁고 옆에 무가 있으며 다시 겨드랑 밑에 작은 무가 달려 있다.
이것이 누비인 것을 보면 방한복을 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두루마기와 결정적으로 같은 것은 숙종 때의 김덕원(金德遠)의 두루마기 직령포이다.
이와 같은 경로를 겪은 오늘날의 두루마기는 1884년(고종 21) 갑신의제개혁 때 사복(私服)은 귀천을 막론하고 넓은 소매의 옷 대신 좁은 소매의 옷을 입게 하였다. 또 관직에 있는 사람은 전복(戰服)을 덧입게 한 데서 일반화되었는데, 갑자기 시행된 이 의복개혁은 국민으로부터 맹렬한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10년 뒤에는 사람들이 통상 예복에 착용하게 되었다. 1895년 을미개혁에서는 관과 민이 동일한 흑색두루마기를 착용하게 하여 두루마기 일색이 되었다.
조선 말기 왕비평상복 발기[件記]에도 두루마기가 나오고, 양반부인·기생의 사진 등에도 이를 입고 있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는 우리 나라 전통포가 마지막 포제인 두루마기로 이어져 완성되었음을 밝혀주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도 예복의 개념에 두루마기가 들어가고 준용되어왔음을 본다. 요즈음은 차츰 이 두루마기를 벗고 마고자를 입는 경향이 있기는 하나 다시 복고풍이 일어 우리 한복에 두루마기를 갖추려는 흐름이 엿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