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程子)는 북송의 유학자 명도(明道) 정호(程顥)와 이천(伊川) 정이(程頤) 형제를 가리키는데, 정자관(程子冠)은 정자가 쓴 관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명칭이다. 정자관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편복 관모로서 『미암일기(眉巖日記)』, 『청강선생후청쇄어(淸江先生鯸鯖瑣語)』, 『학봉집(鶴峯集)』, 『담헌서(湛軒書)』, 『경도잡지(京都雜志)』,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등에 평상시 쓰는 관모로 언급되어 있다. 조선에서는 정자관을 『군신도상(君臣圖像)』, 『삼재도회(三才圖會)』, 『이정전서(二程全書)』 등에 있는 정자도상에서 정자가 쓰고 있는 관모를 모방하여 만들어 썼다. 정자관은 주로 집안에서 도포 · 심의 · 난삼 등을 입을 때 썼는데, 규장각 각신(閣臣)의 관모, 관례(冠禮)의 초가관, 상례(喪禮)의 습의로도 사용되었다.
정자관은 정자도상의 관모를 모방하여 제작되었으므로 19세기 전반까지는 높은 내관과 낮은 외관으로 이루어진 이중관 구조로서 앞트임이 있는 직선적인 외형이었다. 그 모습은 박세채(朴世采), 윤봉구(尹鳳九), 서직수(徐直修), 이채(李采), 홍직필(洪直弼)의 초상에서 볼 수 있다. 19세기 후반에 외관에 있던 앞트임이 봉합되고 곡선적인 외형의 이중관으로 변화되었는데, 우당(愚堂)과 민상호(閔商鎬)의 초상에서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3단으로 겹쳐 만든 삼층관(3층 정자관)이 출현하였다. 20세기에 접어들어 모서리가 뾰족할 정도로 곡선적인 산(山)자 모양으로 변화되었는데 흑백 사진과 유물, 그리고 채용신이 그린 정자관 초상에 잘 남아 있다.
정자관은 곧고 유려하게 흐르다가 힘차게 솟아오르는 조형미가 돋보이는 관모로서,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착용되다가 그 제작 기술이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는, 조형성 · 상징성 · 역사성을 두루 갖춘 소중한 복식 문화유산이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대학자 정자의 사상과 학문을 닮고자 하였으므로 정자관을 유학자로서의 삶의 철학과 자세, 양반 신분을 상징하는 복식 기호로 삼았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곡선적인 복식미를 선호하는 경향과 위엄 있고 화려한 관모로 권세를 과시하려는 심리 등이 반영되어 직선적인 정자관에서 벗어나 조선 고유의 곡선미가 더해진 정자관이 탄생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