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필사본. 1798년( 정조 22) 10월 삼절연공 겸 사은사(三節年貢 兼 謝恩使)의 서장관으로 연행(燕行)하였던 작자가 다음해 4월 초2일 복명(復命)하기까지 왕복 160여일을 일기로 쓴 기행문이다. 사본으로는 장서각에 6책본이 있고, 필사본으로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이본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는 이 한글 연행록과는 다른 한문본 『무오연록(戊午燕錄)』 1책이 있다. 이 한문본은 한글본의 초역본(抄譯本)이고 또 내용도 소략하여, 다른 한문본 완본이 발견되지 않는 한 이 한글본의 원전적 가치는 변함이 없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지금 전하는 한문본은 여행 당시의 기록이라기보다는 뒤에 누군가에 의해 오히려 한글본에서 번역된 것으로 보인다. 이 한문본은 한글본의 1/6∼1/5 정도의 분량밖에 안 되는데다가 필자인 서장관의 이름이 서지수 (徐志修)로 되어 있어 그 문헌적 신빙성이 의심스럽다.
권1은 무오년 8월 9일부터 서장관에 임명된 뒤의 준비 과정과 10월 19일 중국 황제의 표문(表文)을 받고 길을 떠나 12월 6일 쌍양점(雙陽店)에 이르기까지 약 3개월간의 일기이다. 권2는 12월 7일 쌍양점에 머무르고 8일 길을 떠나 19일 북경(北京)에 들고 22일까지 북경에 머무른 일기이다. 권3∼5는 12월 23일부터 기미년 2월 6일까지 북경에 머무른 일기이며, 권6은 2월 7일 돌아올 길을 준비하여 2월 8일 북경을 떠나고 국경에 이른 3월 20일까지의 일기 등으로 되어 있다.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간행한 『연행록선집』에 영인사본이 들어 있고, 이를 풀어 역주한 「 무오연행록」이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간행한 『국역 연행록선집』에 들어 있다.
이 책은 북경 체재 일기가 그 중요한 내용을 차지하고 있지만, 홍대용이나 박지원의 연행록보다 그 관찰의 폭이 제한되어 있는 느낌이 적지 않다. 그것은 앞의 군관들처럼 자유스러운 신분이 아니었고, 서장관으로서의 체모가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한편, 그 때 청나라는 건륭제(乾隆帝)의 상중(喪中)인 관계로 나들이가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무오연행록」은 홍대용(洪大容)의 한글본 「 을병연행록」보다는 30여년, 박지원(朴趾源)의 『 열하일기』보다는 17년 뒤인 18세기에 나온 것이지만, 18세기에도 드물게 보이는 한글로 된 기행문학작품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뿐만 아니라 작자의 특유한 대청관(對淸觀) · 문명관 및 자기비판의 필치가 돋보이는 기행문학이기에 문학사적 의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