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배 ()

쌍학흉배
쌍학흉배
의생활
개념
조선시대, 백관의 흑단령과 반가 여성 예복에 덧붙이던 품계 표식.
이칭
이칭
보(補), 보자(補子)
내용 요약

흉배는 조선시대 백관의 흑단령과 반가 여성의 예복에 덧붙이던 품계 표식이다. 1454년(단종 2) 양성지(梁誠之)의 건의에 따라 문무관 3품 이상이 흉배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세조 대 이후 흑단령에만 사용하였다. 영조 대에는 9품 당하관까지 흉배를 사용하게 되었고 정조 말기에는 문관의 쌍학흉배와 단학흉배는 물론, 무관의 쌍호흉배와 단호흉배도 정착되었다. 한편 조선 전기에는 반가 여성들도 원삼에 남자와 같은 종류의 흉배를 사용하였으나 17세기 이후 18세기 중기까지 원삼과 당의에 모란흉배나 수자흉배, 봉흉배를 사용하였다.

정의
조선시대, 백관의 흑단령과 반가 여성 예복에 덧붙이던 품계 표식.
흉배제도의 제정과 변천

흉배(胸背)는 조선시대 주1흑단령과 여성 예복에 덧붙이던 주2 표식이다. 품계에 따라 문양을 달리하였다. 주3흉배 제정에 관하여 처음으로 논의가 있었던 것은 1446년(세종 28)이었다. 우의정 하연(河演)우참찬 정인지(鄭麟趾)가 흉배를 제정하여 관복주4주5를 가리자고 하였으나 영의정 황희(黃喜)주6을 숭상하고 주7를 억제하는 것이 정치의 급선무인데 국가가 문승(文勝)의 폐가 있는 듯하여 항상 염려가 된다. 단자사라(緞子紗羅)는 우리나라의 산물이 아니다. 또 존비등위는 금대(金帶) · 주8 · 각대(角帶)로 정하고 있으니 흉배를 할 이유가 없다.”고 반대하여 흉배 제정을 그만두었다.

그 뒤 1454년(단종 2) 양성지(梁誠之)의 건의에 따라 문무관 3품 이상의 상복(常服)에 흉배를 붙이게 되었다. 즉, 명나라의 홍무예제(洪武禮制)를 본뜬 것으로, 대군은 기린, 도통사(都統使)는 사자, 주9은 백택(白澤), 대사헌주10, 주25 1품은 공작(孔雀), 2품은 주11, 3품은 주12, 무관 1·2품은 주13, 3품은 웅비(熊羆)를 달도록 정하였다. 이 제도는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명시되었다.

세조 대 이후 흑단령에만 흉배를 부착하는 관행이 정착되었다. 1505년(연산군 11)에는 1품에서 9품까지 모두 흉배를 사용하도록 하였는데 문양도 명나라와는 전혀 다른 저(猪) · 록(鹿) · 아(鵝) · 안(雁) 등의 문양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중종반정으로 인해 본래의 제도로 회복되었고 이는 1506년(중종 1) 정국공신 초상을 통해 알 수 있다. 임진왜란과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이후 주14의 흉배는 주15주16로 변화하였다.

1692년(숙종 18) 6품 이상은 중국 흉배제도를 따르도록 하였고, 1711년(숙종 37) 일본 『조선신사내빙기록(朝鮮信使來聘記錄)』에 당상은 주17을, 주18주19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숙종 대와 영조 대에는 무관이 문관흉배를 사용하는 등 문란하였다. 영조 대의 『속대전(續大典)』에 따르면 당시 흉배 제도가 9품까지 확대되었다. 주20은 운학(雲鶴)을, 주21은 백한(白鷳)을 사용하는 것으로 주22 무관은 『경국대전』 제도와 같다고 하였으나 당시 무관은 사자흉배와 호흉배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록은 실제 제도를 반영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1795년(정조 19) 『일성록(日省錄)』서용보(徐龍輔, 1757~1824)에게 하사한 주23와 조윤식(曹允植)에게 하사한 주24 기록이 보인 이후, 문관의 흉배제도는 당상관의 주52과 당하관의 단학으로 유지되었다. 정조 대부터 보이기 시작한 무관의 주27는 순조 대 이후 쌍호흉배와 주26로 정착되었는데 이 제도는 1910년까지 시행되었다.

대군은 주28를 사용하고 왕자군은 주29를 사용하였는데 기린흉배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흑단령본 초상화와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금사기린흉배, LA 카운티 미술관 소장 기린흉배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백택흉배는 국립고궁박물관 소장의 정원군(定遠君) 시절 원종 주30과 연잉군 시절 영조 어진, 20세기의 백택흉배본을 통해 형태와 크기의 변화도 확인할 수 있다.

반가 여성의 흉배

조선 전기 반가 부인의 흉배는 단령형 원삼(圓衫)에서 확인된다. 양성지(梁誠之, 1415∼1482)『눌재집(訥齋集)』에 “양반 부녀자들이 원삼에 흉배를 달고 대낮에 큰 길[白晝大道]을 활보하면서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원삼에 흉배를 반드시 달았던 것은 아니지만 조선 전기 출토 원삼 중에는 흉배가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반가 부인들의 단령형 원삼에는 관리들이 사용하는 흉배와 동일한 종류가 사용되었다. 주31, 주32, 노사흉배 등이 확인되었는데 16세기까지는 미리 흉배 위치를 계획해서 짠 직금흉배 주33으로 원삼을 만들기도 하고 별도로 흉배를 주43 완성된 원삼에 부착하기도 하였다.

17세기 중기 이후 남자 흉배와는 다른, 여자 흉배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단하(李端夏, 1625~1689) 부인의 주34에는 좌우로 배열된 자수 봉흉배가 사용되었고 사천목씨(泗川睦氏, 1657~1699) 묘에서 출토된 원삼에는 자수 수자(壽字) 모란흉배가 부착되었다. 18세기 김원택의 부인 청송 심씨(靑松沈氏, 주35 묘 원삼에는 주41로 수놓은 수자흉배(壽字胸背)가 달려 있다.

당의 흉배는 18세기 이후 확인되는데 김원택 부인 청송 심씨 묘에서는 봉흉배 1쌍을 단 주36가 출토되었다. 또한 거의 동시대 유물로, 경기도박물관 소장 안동 주37 묘의 포도문단 당의에도 비슷한 형태의 봉흉배(22.5×25.5㎝)가 달려 있다. 왕실 여성들은 상하로 배열된 봉흉배를 사용한 반면에, 주38 여성은 좌우로 배열된 봉흉배를 사용하였다.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 1648∼1723)은 『공사문견록(公私聞見錄)』에서 숙종 대에 반가 부인은 물론, 서민 여자들까지 흉배 사치가 대단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1656년(효종 7) 본인이 주39와 혼례를 할 때만 해도 대군부인과 공주들만 봉흉배를 사용하였는데 50년이 지난 18세기 초에는 사대부 집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 혼례 때에는 주40 부인들까지 봉흉배를 달고 나올 정도로 사치스러워졌다.”고 하였다. 신분에 관계없이 예복에 봉흉배를 사용할 만큼 사치스러워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8세기 중기 이후로는 반가 부인의 흉배 사용은 확인되지 않는다. 공주와 옹주 등의 궁중 여성들만 금사를 사용한 주42 봉흉배를 사용하였다.

흉배의 조형적 변화

조선 전기에는 옷감에 직접 흉배 무늬를 짠 직성필료(織成匹料) 소재가 사용되었으나 점차 흉배만을 직조하여 조각으로 부착하는 형식으로 변화하다가 17세기 이후로는 대부분 자수 흉배를 사용하게 되었다. 흉배 바탕은 복식의 색상과 같은 색상을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17~18세기에는 붉은 바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흉배는 시대에 따라 도안의 종류나 형태가 변화하였다. 계급의 표시가 되는 주도안을 중심에 놓고 구름 · 주51 · 주44 · 삼산(三山) · 주45 · 파도 · 물결 · 물방울 등을 주변에 배열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사실적 표현의 도안이었으나 점차 양식화된 도안으로 변하였다. 주도안의 색상도 조선 전기에는 공작이나 주46처럼 주도안을 사실적 색상으로 표현하였으나 18세기 이후에는 흰색으로 표현하였다. 주47과 백한은 물론, 호랑이나 사자, 쌍호와 주49 모두 흰색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구름 문양도 17세기 전기에는 주도안 주변에 배치된 구름 모양이 가로로 길게 퍼진 형태로 표현되었으며 얇은 주50에 납사수[納繡] 혹은 쇄선수(洒線繡)라고 하는 자수로 작은 마름모꼴 도안으로 바탕을 메꾼 흉배가 유행하였다. 17세기 중기 이후 흉배의 크기가 커지면서 전체적으로 빈 공간이 나타나는 형태로 변화하였으며 크게 표현되었던 모란이 사라졌다. 18세기 이후에는 도안 전체가 짜임새가 있게 변화하면서 구름 모양도 양식화되었으며 하단에 괴석, 삼산, 영지, 물결무늬와 물방울 등이 표현되었다. 18세기 후기부터는 쌍학과 단학의 입에 모란, 복숭아, 영지 등이 물리기 시작하는데 19세기 이후에는 영지를 무는 것으로 정착하였다.

관련 풍속

섭성(攝盛) 풍속에 의해 주53들의 혼례에도 관원의 관복을 착용할 수 있도록 허용함에 따라 쌍학이나 단학흉배를 부착한 주54을 신랑의 혼례복으로 착용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경국대전(經國大典)』
『국조속오례의보서례(國朝續五禮儀補序例)』
『단종실록(端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속대전(續大典)』
『순종실록(純宗實錄)』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일성록(日省錄)』
『조선신사내빙기록(朝鮮信使來聘記錄)』
『청파극담(靑坡劇談)』

단행본

故宮博物院, 『明淸织綉』(上海: 上海科学技术出版社, 2005)
『(문화재대관 중요민속자료) 복식·자수편』 2(문화재청, 2006)
『한성부 판윤 김원택 묘역 출토 복식』(충북대학교박물관, 2006)
山东博物馆·山东省文物考古硏究所, 『魯荒王墓 上』(北京: 文物出版社, 2014)
『색을 입히고 수를 놓다』(국립무형유산원, 2019)

논문

이은주, 「조선시대 무관의 길짐승흉배제도와 실제」(『복식』 58-5, 한국복식학회, 2008)
이주영, 「『조선신사내빙기록』을 통해 본 1711년 통신사 복식」(『한복문화』 17-2, 한복문화학회, 2014)
하명은·이은주, 「날짐승흉배의 감정(鑑定)을 위한 기준 설정」(『한복문화』 10-3, 한복문화학회, 2007)
주석
주1

모든 벼슬아치. 우리말샘

주2

여러 벼슬자리에 대하여 매기던 등급. 제일 높은 정일품에서 제일 낮은 종구품까지 18단계로 나뉘어 있다. 우리말샘

주3

관아에 나가서 나랏일을 맡아보는 사람. 우리말샘

주4

높고 낮음이나 좋고 나쁨 따위의 차이를 여러 층으로 구분한 단계. 우리말샘

주5

사회적 지위나 신분의 존귀함과 비천함. 우리말샘

주6

검소하고 소박함. 우리말샘

주7

필요 이상의 돈이나 물건을 쓰거나 분수에 지나친 생활을 함. 우리말샘

주8

종육품에서 정삼품까지의 문무관이 허리에 띠던 띠. 은으로 새긴 장식을 가장자리에 붙였다. 우리말샘

주9

임금의 서자에게 주던 작위. 대군(大君)과 구별하기 위한 말이다. 우리말샘

주10

‘해태’의 원말. 우리말샘

주11

구름과 학을 새기거나 그린 무늬. 우리말샘

주12

꿩과의 새. 꿩과 비슷한데 수컷의 등과 꽁지는 흰색이고 배는 검은색이며 뺨과 볏은 붉은색이다. 머리에는 붉은빛을 띤 흑색의 깃이 있다. 암컷은 암탉과 비슷한데 작다. 관상용으로 기르며 티베트, 하이난섬 등지의 산지(山地)에 분포한다. 우리말샘

주13

호랑이와 표범을 아울러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14

군에 적을 두고 군사 일을 맡아보는 관리. 우리말샘

주15

조선 시대에, 무관 관복의 가슴과 등에 달던, 호랑이를 수놓은 천 조각. 당상관은 두 마리, 당하관은 한 마리를 수놓았다. 우리말샘

주16

조선 시대에, 대사헌의 관복에 붙이던, 해태를 수놓은 표장. 우리말샘

주17

두루밋과의 새. 몸의 길이는 1.4미터, 편 날개의 길이는 2.4미터, 부리는 15~17cm이며, 몸은 흰색이고 이마ㆍ목ㆍ다리와 날개 끝은 검은색이다. 머리 위에 살이 붉게 드러나 있으며 부리는 녹색이다. 풀밭에 주로 살며 겨울 철새로 한국, 일본, 중국 등지에서 겨울을 보내고 시베리아에서 번식한다. 천연기념물 정식 명칭은 ‘두루미’이다. 우리말샘

주18

장군의 지휘 아래. 또는 그 지휘 아래에 딸린 군사. 우리말샘

주19

꿩과의 새. 꿩과 비슷하나 깃이 매우 화려하고 몸이 크다. 날개의 길이는 수컷이 50cm, 암컷은 40cm, 꽁지는 1.5미터 정도이며, 머리 위에 10cm 정도의 깃털이 삐죽하게 있는데 수컷이 꽁지를 펴면 큰 부채와 같으며 오색찬란하다. 암컷은 수컷보다 작고 꽁지가 짧으며 무늬가 없다. 미얀마, 말레이반도, 스리랑카, 인도 등지에 분포한다. 우리말샘

주20

당상의 품계에 있는 벼슬아치. 우리말샘

주21

당하의 품계에 있는 벼슬아치. 우리말샘

주22

법률로 정해지다. 우리말샘

주23

한 쌍의 학을 수놓은 흉배. 당상관 이상의 문관 공복에 붙였다. 우리말샘

주24

당하관 문관이 입는 공복(公服)의 가슴과 등에 붙이던 헝겊 조각. 학 한 마리를 수놓았다. 우리말샘

주25

군인의 지위나 신분을 가지지 않는, 군대에서 사무를 보는 관리. 우리말샘

주26

당하관 무관이 입는 상복(常服)의 가슴과 등에 붙이던 헝겊 조각. 호랑이 한 마리를 수놓았다. 우리말샘

주27

한 쌍의 범을 수놓은 흉배. 당상관 이상의 무관 공복에 붙였다. 우리말샘

주28

조선 시대에, 대군(大君)이 붙이던 흉배. 기린과 구름무늬를 수놓았다. 우리말샘

주29

조선 시대에, 왕자군이 달던 흉배. 백택이라는 상상의 짐승 모양을 수놓았다. 우리말샘

주30

임금의 화상(畫像)이나 사진. 우리말샘

주31

조선 시대에, 정일품ㆍ종일품의 문관이 달던 흉배. 공작을 수놓았다. 우리말샘

주32

조선 시대에, 무관 관복의 가슴과 등에 달던, 호랑이를 수놓은 천 조각. 당상관은 두 마리, 당하관은 한 마리를 수놓았다. 우리말샘

주33

필로 된 비단. 우리말샘

주34

부녀 예복의 하나. 흔히 비단이나 명주로 지으며 연두색 길에 자주색 깃과 색동 소매를 달고 옆을 튼 것으로 홑옷, 겹옷 두 가지가 있다. 주로 신부나 궁중에서 내명부들이 입었다. 우리말샘

주35

경상북도 청송을 본관으로 하는 우리나라 성(姓)의 하나. 우리말샘

주36

여자들이 저고리 위에 덧입는 한복의 하나. 앞길과 뒷길이 저고리보다 길고 도련은 둥근 곡선으로 되어 있으며 옆은 진동선 아랫부분이 트여 있다. 조선 시대에 예복으로 사용하였다. 우리말샘

주37

경상북도 안동을 본관으로 하는 우리나라 성(姓)의 하나. 우리말샘

주38

양반의 집안. 우리말샘

주39

조선 효종의 딸(1645~1668). 인선 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 소생으로, 영의정을 지낸 정태화(鄭太和)의 아들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과 혼인하여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우리말샘

주40

서자 자손의 혈족. 우리말샘

주41

견사를 사용한 조직의 바탕에 금실로 무늬를 넣은 직물. 우리말샘

주42

골상학(骨相學)에서, 사람의 상격(相格)을 오행(五行)으로 나눌 때 금(金)에 해당하는 상격. 우리말샘

주43

기계나 베틀 따위로 천을 짜다. 우리말샘

주44

돌덩이보다 작고 자갈보다 큰 돌. 우리말샘

주45

불로초과의 버섯. 줄기는 높이가 10cm 정도이고 삿갓은 심장 모양 또는 원형이다. 전체가 가죽 모양의 코르크질로서 단단하고 적갈색 또는 자갈색의 윤이 난다. 말려서 약용한다. 한국, 일본, 북반구의 온대 이북에 분포한다. 우리말샘

주46

조선 시대에, 정이품과 종이품 문관이 관복에 달던 흉배. 구름과 기러기를 수놓았다. 우리말샘

주47

두루밋과의 새. 몸의 길이는 1.4미터, 편 날개의 길이는 2.4미터, 부리는 15~17cm이며, 몸은 흰색이고 이마ㆍ목ㆍ다리와 날개 끝은 검은색이다. 머리 위에 살이 붉게 드러나 있으며 부리는 녹색이다. 풀밭에 주로 살며 겨울 철새로 한국, 일본, 중국 등지에서 겨울을 보내고 시베리아에서 번식한다. 천연기념물 정식 명칭은 ‘두루미’이다. 우리말샘

주48

꿩과의 새. 꿩과 비슷한데 수컷의 등과 꽁지는 흰색이고 배는 검은색이며 뺨과 볏은 붉은색이다. 머리에는 붉은빛을 띤 흑색의 깃이 있다. 암컷은 암탉과 비슷한데 작다. 관상용으로 기르며 티베트, 하이난섬 등지의 산지(山地)에 분포한다. 우리말샘

주49

날도랫과 곤충의 애벌레. 몸의 줄기는 높이가 2~6cm이며, 분비액으로 원통 모양의 고치를 만들어 그 속에 들어가 물 위를 떠돌아다니며 작은 곤충을 잡아먹는다. 여름에 나비가 된다. 낚싯밥으로 쓴다. 우리말샘

주50

생사로 성기게 짠 얇고 가벼운 천. 우리말샘

주51

작약과의 낙엽 활엽 관목. 높이는 2미터 정도이고 가지는 굵고 털이 없으며, 잎은 크고 이회 우상 복엽이다. 늦봄에 붉고 큰 꽃이 피는데 꽃빛은 보통 붉으나 개량 품종에 따라 흰색, 붉은 보라색, 검은 자주색, 누런색, 복숭앗빛을 띤 흰색 따위의 여러 가지가 있다. 열매는 골돌과(蓇葖果)를 맺는다. 근피(根皮)는 두통ㆍ요통에 쓰는 약이나 건위제, 지혈제, 진통제의 약재로 쓰인다. 추위에는 강하나 더위에는 약하며 연평균 15℃ 이상의 따뜻한 지방에서는 발육이 부진하다. 인가나 화원에서 관상용으로 재배한다. 중국이 원산지이다. 우리말샘

주52

한 쌍을 이루는 두 마리의 학. 우리말샘

주53

아무 벼슬이나 신분적 특권을 갖지 못한 일반 사람. 우리말샘

주54

조선 시대에, 깃을 둥글게 만든 관복. 우리말샘

집필자
이은주(안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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