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용보

  • 역사
  • 인물
  • 조선 후기
조선 후기에, 대사헌, 의정부우참찬, 내의원제조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 심재(心齋)
  • 여중(汝中)
  • 시호익헌(翼獻)
인물/전통 인물
  • 본관달성(達城)
  • 사망 연도1824년(순조 24)
  • 성별남성
  • 주요 관직대사헌|의정부우참찬|내의원제조
  • 출생 연도1757년(영조 33)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홍순만 (제주농민교육원, 역사)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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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대사헌, 의정부우참찬, 내의원제조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여중(汝中), 호는 심재(心齋). 달성부원군(達城府院君) 서종제(徐宗悌)의 현손이며, 서명백(徐命伯)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서신수(徐信修)이고, 아버지는 판서 서유령(徐有寧)이며, 어머니는 송의손(宋宜孫)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74년(영조 50) 생원시에 합격, 이해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1783년(정조 7) 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이 되었다. 1792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를 다녀왔으며, 경기도관찰사·규장각직제학, 이조·형조의 참판,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대사헌 등을 지내고, 1799년 예조판서에 승진하였다.

그 뒤 이조판서·좌부빈객(左副賓客)·대사헌·의정부우참찬·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 등을 지내고, 1800년 순조가 즉위하던 해 우의정이 되었다. 하지만 1801년 이안묵(李安默)이 홍낙임을 탄핵하면서 서용보의 아버지 서유녕(徐有寧)도 함께 공박하였다. 서유녕은 1779년(정조 3) 화완옹주와 정후겸, 그리고 정순왕후의 오빠였던 김구주 등을 탄핵하였었는데 이 사건이 빌미가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서용보가 사직 상소를 올리고 향리로 돌아가자 정순왕후가 직접 하교하여 서용보를 위로하고 복귀할 것을 종용하였다. 서용보는 우의정으로 복귀한 후 1802년 좌의정이 되었으며, 1804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1805년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진하 겸 사은정사(進賀兼謝恩正使)가 되어 청나라를 다녀온 뒤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가 있다가, 14년 뒤인 1819년(순조 19) 영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영의정을 사임하고 판중추부사·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지냈다. 정조와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신임이 두터워 항상 측근에서 정사를 보좌하였고 민심수습에 공로가 컸다. 시호는 익헌(翼獻)이다.

참고문헌

  • - 『정조실록(正祖實錄)』

  • - 『순조실록(純祖實錄)』

  • - 『국조방목(國朝榜目)』

  • -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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