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대 ()

목차
관련 정보
오각대
오각대
의생활
물품
백관이 관복(官服)에 두르던 띠.
목차
정의
백관이 관복(官服)에 두르던 띠.
내용

착용자의 신분과 계급에 따라 차별을 두었다. 관원이 공복 등에 띠를 두르던 것은 신라시대에 이미 제도화되었고, 고려에서는 계급에 따라 구분하여 제도화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더욱 발달되어 계급에 따라 장식이 다양해졌다.

조선 말기 각대를 보면 가죽바탕에 비단으로 싸고 그 위에 석줄이나 다섯줄의 금줄 혹은 검정줄을 그어 띠의 바닥[帶鞓]을 만들었다, 그리고 양끝은 장방형의 띠돈[大銙]과 걸이쇠[鉸具]를 붙여 띠의 앞 중심에 오도록 하였다.

그 양옆은 작은 장방형의 띠돈[小銙]을 대고 다시 그 양옆은 심엽형(心葉形)의 띠돈을 간격을 두어 붙이고, 뒷면에는 장방형의 띠돈을 연결해 붙였다.

띠의 길이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나 가슴둘레보다 커서 보통 120㎝ 정도이며, 너비는 5㎝ 정도이다. 각대는 관복의 겨드랑 밑에 있는 고리에 끼워 앞가슴에 오도록 하였다.

뒤는 허리에 내려오도록 띠어 실용성보다 장식적 구실을 하였다. 띠의 종류는 띠돈의 재료에 따라서 옥대(玉帶)·서대(犀帶)·비취대(翡翠帶)·수정대(水晶帶)·금대(金帶)·은대(銀帶)·각대 등이 있다.

옥대는 고려시대에는 왕과 전공을 세운 중신이나 중흥공신(中興功臣)이 띠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왕·왕세자·왕비만 띠었다. 서대는 중국에서 생산되는 무소뿔로 만들었으며, 옥대 다음으로 여겼다.

고려시대에는 제한없이 띠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세자가 공복을 착용할 때와 일품관(一品官)이 관복을 착용할 때 띠었다. 비취대는 왕세자가 띠던 띠이며, 수정대는 왕세손이 띠던 띠로 옥(玉)은 너무 중(重)하고 서(犀 : 무소의 뿔)는 너무 가볍다고 하여 인조 때 착용하도록 하였다.

금대는 서대 다음으로 여겼으며, 동(銅)에 금물을 입혀 만들었다. 화조문(花鳥紋) 등을 새긴 삽금대(鈒金帶)와 문양을 새기지 않은 소금대(素金帶)가 있다.

삽금대는 정2품에게, 소금대는 종2품에게 착용하도록 하였다. 또, 왕자나 군(君)이 띠던 백택금대(白澤金帶)와 대군용(大君用)의 기린금대(麒麟金帶)가 있다. 여지금대(荔枝金帶)는 황색의 각(角)에 진홍점(眞紅點)을 찍어서 여지피(荔枝皮)의 황실홍(黃實紅)과 같게 한 것으로 종2품과 정3품의 공복에만 띠도록 하였다.

은대는 띠돈에 문양을 새긴 삽은대(鈒銀帶)와 문양을 새기지 않은 소은대(素銀帶)가 있는데, 정3품은 삽은대, 종3품은 소은대를 띠도록 하였다. 흑각대(黑角帶)는 3품 이하 관원의 공복과 5품 이하 관원의 조복에 띠었다.

≪세종실록≫에는 흑각대가 국휼복(國恤服)으로 국상 때 왕·왕세자·종친과 문무백관이 띠던 것이라 기록되어 있다. 포각대(布角帶)는 국상 때 관원들이 띠던 띠로 바닥의 겉과 안을 포(布)로 싸고 띠돈도 포로 싸서 띠에 붙였다.

참고문헌

「한국과대의 역사적연구」(안명숙, 이화여자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76)
「우리나라 띠에 대한 연구」(金正子, 세종대학대학원석사학위논문, 1980)
관련 미디어 (5)
집필자
김정자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