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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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순(1896-?)
김명순(1896-?)
사회구조
개념
개항기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신식 교육을 받은 여성. 신여자.
이칭
이칭
신여자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신여성은 개항기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신식 교육을 받은 여성이다. 신여자라고도 한다. 중등교육이나 고등교육을 받고 기존 질서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가치와 태도를 추구하여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던 여성들을 신여성이라 했다. 영국 빅토리아 후기에 처음 나타나 곧 세계적 현상으로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등장한 집단이다. 경제적 독립을 추구하고 기존의 결혼제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자신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현·표명하는 특징을 보였다. 일본에서는 1910년에 신여성이 등장했고, 우리나라는 동경유학을 다녀온 선두주자들이 1920년에 신여성론을 본격 제기했다.

목차
정의
개항기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신식 교육을 받은 여성. 신여자.
연원

신여성은 주로 일제강점기에 많이 사용되던 용어이다. 이 용어가 언제, 누구에 의하여 최초로 사용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일제강점기 초부터 널리 통용되었다. 특히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김원주(金元周, 일명 金一葉)『신여자』 제2호에 ‘신여자선언’을 발표하는 등 신여성에 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경우 1910년 쓰보우치(坪內逍遙)가 ‘새로운 여성’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한 뒤 이 말이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여류문인 히라쓰카(平塚雷鳥)가 『청탑』이라는 잡지를 통하여 본격적인 ‘신여성론’을 전개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신여자』가 김원주에 의하여 1920년에 창간된 것을 감안하면, 일본과 한국의 신여성론은 약 10년 간의 시차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한국 신여성론의 선두주자들이 여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유학을 마친 뒤 귀국하기까지의 기간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신여성’은 영국 빅토리아 후기 시대에 처음 나타나서 곧 다른 여러 사회에서 등장한 세계적 현상이다. 각 사회에서 신여성은 중등교육이나 고등교육을 받은 초기 세대들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가치와 태도를 추구하는 존재로 등장하였다. ‘신여성’이라는 어휘는 경제적 독립을 추구하고 기존의 결혼제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자신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표명하는 일군의 집단을 가리켰으며, 다양하고 뜨거운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다는 것이 세계적인 공통점이다.

내용

신여성이 등장한 직접적인 역사적 배경은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전개되었던 여성교육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여성교육운동은 선교의 한 수단으로 여성교육에 착안했던 기독교 선교사들과 국가의 자강을 위해 여성들의 역할에 주목했던 애국계몽운동가들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이들이 추구했던 여성교육 목표는 서로 반드시 일치하지 않았지만, 이러한 교육을 통하여 여성들은 비로소 전통적인 이성관(異性觀)의 한계와 여성 사회진출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되었다.

초기 여성교육운동은 민중의 호응을 얻지 못한 채 일부 개화된 양반 관료층 부녀들이나 천민층 고아 · 기아들을 대상으로 한 매우 제한된 것이었다. 그러나 점차 여성교육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 호전되면서, 광범위한 계층의 여성들이 신교육을 받게 되었다. 당시 신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전통적인 여성, 즉 ‘구여성’에 대립되는 ‘신여성’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우리 나라 여성들이 받았던 신교육 경험은 단순히 새로운 지식습득의 계기 뿐 아니라 남녀 평등을 강조하는 서구 사상과 본격적으로 접함으로써 새로운 여성의 사회적 지위 및 역할에 눈을 뜨게 하였다.

구한말에서 1910년대까지가 신여성층의 형성기였다면, 1920년대는 신여성들이 사회에 진출하여 신여성론을 전개함으로써 사회적 이목을 집중시킨 시기였다. 1920년대는 일제의 이른바 문화통치정책에 의해서 조장된 관념상의 자유주의적인 분위기가 사회를 풍미하던 시기였다. 이 무렵 전통에 대한 부정의식이 사회일반에 팽배해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하에서 신여성론이 개화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20년을 전후하여 동경유학을 마치고 귀국해서 활발한 사회활동을 전개하여 여류명사가 되었던 김원주 · 김명순(金明淳, 일명 金彈實) · 나혜석(羅蕙錫) 등은 신여성의 상징적인 존재로 부각되었다. 이들은 ‘신여자 선언’ 등을 통하여 종래의 한국여성들이 남성들의 부당한 억압 아래서 노예적 지위에 있었음을 논하고, 남녀평등사상에 기초한 새로운 남녀관계 수립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전통적인 윤리관에 위배되는 자유분방한 사생활을 영위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몸으로 실천함으로써 세인들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이러한 신여성들의 행적은 곧 철저한 남녀간 신분에 따른 역할분화에 기초하던 기존의 성별도덕에 대한 정면도전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이들은 급격한 사회변화 과정에서 파행적인 사회화과정을 겪으면서 기존의 가부장적 가족질서에 대한 회의감을 품게 되었으며, 근대적 학교교육, 동경유학을 통하여 자유연애의 새로운 남녀관계에 눈을 뜨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에 의하여 제기되고 실천되었던 신여성론은 단순히 서구모방적이고 공허한 관념상의 것만은 아니었으며, 그들의 성장과정이나 자기체험과 밀접히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신구의 문화가 갈등 속에 공존하던 과도기적 상황의 산물이었던 이들은 전통에 대체되는 새로운 가치관을 체계적으로 정립시킬 수 없었다. 이에 따라 그들은 스스로를 ‘선각자’라고 자처했으나, 세인들은 신여성들의 무절제한 사생활에 주목하여 강력한 비난을 퍼붓게 되었다. 이러한 비판은 신여성층 내부에서도 제기되었다. 특히 대중계몽 및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조직화한 사회운동에 참여하던 여성운동가들은 일부 신여성들의 무절제한 사생활을 비판하면서 여성문제는 전반적인 사회구조적 개혁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들은 사회주의이론 등과 관련된 보다 체계적인 여성해방사상을 전개함으로써 앞서의 신여성론자들이 누리지 못했던 사회적인 호응과 위세를 얻을 수 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김원주를 비롯한 ‘문제있는’ 사생활을 지닌 신여성들은 점차 사회로부터 고립되기 시작하였다. 식민지라는 사회적 상황은 민중들이 일제에 의해 주도되는 문화변동에 강한 저항감을 갖게 하고, 오히려 전통적인 윤리규범을 강조하는 문화적 지속성을 고양시켰던 것이다. 민중들은 당시 지식인들의 추상적인 이념에는 관심이 없었던 반면에, 행동 차원에서 전통적인 성윤리를 거부하고 나서는 신여성들에 대해서 강력한 반발감을 보이기에 이르렀다. 고립된 상황에 놓인 신여성들은 내적 갈등 상태에 빠져들고, 결국은 사회로부터 도태되어 갔다. 윤심덕(尹心悳) · 김원주 · 김명순 · 나혜석 등의 비극적인 말로가 그 상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신여성, 근대의 과잉 1920-1934』(김수진, 소명출판, 2009)
『한국근대여성개화사』(이현희, 이우출판사, 1978)
『한국여성의 지위』(이효재·김주숙,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76)
『한국근대여성사』(박용옥, 정음사, 1975)
『한국여성사』Ⅰ·Ⅱ·Ⅲ (이화여자대학교 여성문제연구소, 1972)
『한국여성운동사』(정요섭, 일조각, 1971)
「일제하 한국신여성의 역할갈등에 관한 연구」(이종원,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3)
「일제하 신여성의 연애·결혼문제」(신영숙, 『한국학보』45, 1986)
「한국여성의 신문화운동」(정세현, 『아세아여성연구』10,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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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김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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