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여자』는 최초로 여성이 만든 여성잡지로서 당시 대표적인 신여성인 김원주[김일엽]가 편집주간이었고, 신여성들이 다수 참여하였다. 『신여자』는 의욕적으로 ‘신여자’를 내세우며, 여성운동과 여성의 사회의식을 북돋우는데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1919년 3·1만세시위 이후 이른바 일제의 문화통치기에 여성잡지는 활기를 띤다. 이 시기 여성잡지들은 대체로 여성교육과 여성의식 계몽, 의식주 생활개선, 여성해방운동, 민족독립의식을 보급하고, 여론을 형성하는 ‘장’의 역할을 일정하게 하였다. 이는 곧 당시 여성의 공사 영역의 생활변화와 의식의 변화를 보여주는 한편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였다.
창간 당시 방정환의 자문을 얻고, 출간 이전에 나혜석, 박인덕, 김활란 등이 ‘청탑회(靑塔會)’를 조직하여 주 1회 모임을 가지며 준비를 하였다. 편집 겸 발행인 빌링스부인(Mrs. Billings), 인쇄소 박문관, 인쇄인 박인환, 발행소 신여자사이며, 실제 편집은 당시 주간인 김일엽이 하였다.
『신여자』는 1920년 3월부터 6월까지 월간지로 발간되었으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4호, 한 권뿐이다. 판형은 국판 66면이다. 한글과 한자가 혼용되었는데, 한글보다 한자가 더 많이 쓰였고, 오늘날 맞춤법이나 띄어쓰기와는 판이하게 다른데다가 고어체라 읽기가 쉽지 않다.
김일엽으로 대표되는 당시 신여성의 소망이 이 책의 전체 흐름을 관통하고 있다. 우선 책머리 첫 글에서 「먼저 현상을 타파하야」로 봉건적 여성 억압의 굴레를 벗어나 진정으로 각성한 여자, 즉 ‘신여자’로 ‘개조’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현실에 대한 투철한 인식을 바탕으로 구습을 타파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김추당이 쓴 「남녀를 통함」에서는 남녀가 힘을 합하여야 사회가 발전하리라는 논리가 세계추세에 맞춰 설명되고 있다. 특기할 내용은 김편주의 「청상과부의 생활」과 나혜석의 「4년전 일기」이다. 김편주의 글은 조혼과 개가 금지, 부모에 따른 혼인제라는 구습과 악폐에 대한 자신의 소감을 진솔하게 드러내고 있다. 나혜석의 글 역시 솔직한 연인, 결혼상대자 김우영과의 1916년 8월 만남에 대한 글로 자유연애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김송월의 「어떠한 남편을 얻을까?」도 결혼과 연애에 대한 감정을 그리고 있다.
김활란의 「남자의 반성을 촉(促)함」은 신여성을 사치 허영에 빠진 여성이라고 하는 남성들의 비판은 지극히 잘못된 것이라는 반박의 글이며, 신현덕의 「어머니의 보석」 은 어떠한 보석보다 더 빛나는 보석이 어머니[여자]에게 자녀임을 역시 이탈리아 로마의 코넬리아 세 모자의 예로 설파하고 있다. 이외에 「워싱턴의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심용(沈勇)」 등 외국의 배울만한 선진 여성의 예들을 간단히 소개하는 등 서구의 앞선 문명을 알려 신여성들이 자신들의 상황을 비교 판단하도록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밖에 오늘날에도 자주 인용되는 김일엽의 일상을 그린 나혜석의 삽화 4컷이 실려 있다.
『신여자』에 게재된 기사를 통해 당시 여성의 현실을 파악하고 분석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여성의 근대성 담론, 즉 봉건적 여성 억압과 가부장제 인습의 타파에서부터 자유연애, 자유결혼, 그에 따른 여성의 해방과 사회의식에 대한 당시 신여성의 입장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신여자』는 여성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여성잡지로, ‘신여성’이란 유행어를 만들어냈다고 할 만큼 신여성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신여성이 본격적으로 사회에 부각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전에 비해 훨씬 진보적인 신여성의 목소리로 여성해방, 여성의 지위향상을 주장하며, 실제적인 남녀 동권을 요구하는 진전된 여성의 역량을 볼 수 있다. 주 독자층이 여학생 또는 여학교를 졸업한 신여성인 동시에 가정 부인 또는 직장 여성이었다는 점은 그만큼 신여성의 사회적 영향력이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