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10월 창단된 서울바레단은 한동인의 주도하에 정지수, 장추화 등 단원 12~20명 정도의 규모로 설립되었다. 서울 배제중학교를 졸업하고 한성준에게 무용을 사사받은 한동인은 1939년 일본으로 유학해 아즈마(東勇作)의 제자로서 가마쿠라 발레연구소의 엘리아나 파블로바에게 발레를 배운 후 귀국하면서 1946년에 서울바레단을 창설하였다.
서울바레단은 1946년 10월 9일 서울중앙극장에서 창립공연으로 「레 실피드」(정지수, 박영식, 김영, 김리원, 조영희, 허문향, 박진원 출연)를 무대에 올렸고, 1947년 7월 제2회 공연은 「민족의 피」를 상연함으로써 한국 발레계에 신기운을 고취하였다. 1948년 10월 제3회 공연은 「호두까기 인형」, 1949년 제4회 공연은 시공관(현 명동예술극장)에서 한동인과 김영이 남녀 주인공을 맡은 창작발레 「꿩」(류성희, 허문경, 김미호, 천완순, 강미초 출연), 「장미의 정」을 발표하였다. 1950년 제5회 「인어공주」, 「향수」는 6월 24일부터 30일까지 부민관(현 국립극장)에서 공연될 예정이었으나 6·25전쟁 발발로 인해 무산되었고, 한동인은 몇몇 문하생들과 함께 납북되었다.
서울바레단의 활동은 우리나라 발레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본격적인 고전발레 레퍼토리와 중·장편 창작발레를 선보임으로써 신무용에 이은 또 하나의 장르가 자리 잡게 된 계기를 만들었다.
전문가로 구성된 공연예술인을 모아 발레단을 구성했고, 안무가, 발레리나, 스텝의 역할 분담을 통해 무용단의 레퍼토리화 작업, 공연예술가와 무용가와의 분리, 지속적인 훈련, 정기공연과 공연의 완성도 등을 추구하였다. 이 단체는 전문성을 위한 지속적 훈련 및 레퍼토리 작업, 창작발레를 위한 주변예술인의 확보, 이를 통한 공연 시스템에 대한 인식확대 등 전문무용단의 시스템을 추구한 최초의 단체였다고 할 수 있다. 즉 무대장치, 조명, 의상, 프로그램 편집까지 공연제작에 전문성을 부여하며 무용계의 저변확대와 함께 전문화를 위한 준비단계에 이르게 되는데 기여하였다. 그리고 서울바레단의 활동을 통해 한동인은 아카데미즘의 첫 시도자, 무용기업화의 시도자, 본격적인 발레운동의 주창자로 평가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