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나주(羅州). 호는 정월(晶月). 수원 출생.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화가이다. 서울의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여자미술학교(女子美術學校; 죠시비) 서양화과 선과보통과에서 유학하였다.
한말에 사법관을 거쳐 시흥군수와 용인군수를 지낸 나기정(羅基貞)의 5남매 중 넷째로 수원에서 태어났다.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입학하기 전에는 이름이 아지(兒只), 입학 후에는 명순(明順)이었으나, 졸업 무렵에는 혜석으로 바꾸었다. 진명여학교를 최우등생으로 졸업하였다.
일본으로 건너간 이듬해인 1914년에 도쿄 유학생 잡지인 『학지광』에 「이상적 부인」을 발표하였고 1918년에는 『여자계』에 단편소설 「경희」를 발표하였다. 1918년에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돌아와 잠시 정신여학교 미술 교사를 지냈다.
1919년 3 · 1 운동에 참가하여 5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1921년 경성일보사 내청각(來靑閣)에서 첫 유화 개인전을 가졌으며, 4월에는 제1회 서화협회전람회에 홍일점으로 유화를 출품하였다. 1922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 해마다 작품을 출품하여 수상과 특선을 거듭하였다. 1931년에는 도쿄의 제국미술원전람회에서도 입선하였다.
1927년에는 만주 안동현(安東縣) 부영사로 일본 정부 외교관 신분이던 남편 김우영(金雨英)과 함께 세계 일주 여행에 올라 파리에서 약 8개월간 머무르면서 야수파 화가 비시에르(Roger Bissière, 1888∼1964)의 화실에서 그림을 공부하였다.
이어 유럽 각국의 미술관 순례를 통해서 미술 시야를 넓히고, 미국을 거쳐 1929년에 귀국하였다. 같은 해, 수원에서 ‘구미 사생화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1930년 남편과 이혼한 뒤에는 그림에만 몰두하였고, 1933년에는 종로구 수송동에 여자미술학사를 설립하였다.
1934년에는 『삼천리』에 「이혼고백서」를 발표하여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최린에게 정조유린에 대한 위자료를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하였다. 1935년「신생활에 들면서」(『삼천리』)를 발표하고 1936년에 소설 「현숙」을, 1937년에는 소설 「어머니와 딸」을 발표하였다.
나혜석의 화가로서의 활동은 1935년 서울의 조선관 전시장에서 가졌던 「근작 소품전」을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
1937년 무렵부터 방랑생활에 빠져들었고, 1948년 이혼과 정신 장애, 반신불수의 비극 속에서 생애를 마쳤다.
작품 경향은 크게 2기로 나눌 수 있다. 파리에 가기 이전에는 주로 사실적인 수법으로 인물과 풍경을 그렸고, 그 뒤로는 야수파와 표현파 등의 영향을 받아들인 한결 참신한 수법을 보였다. 대표작으로 파리에서 그린 「무희」(국립현대미술관 소장)와 「스페인해수욕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