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6월 평양숭의여자중학교 동창회 잡지부에서 창간하였지만, 동창회의 승인을 얻어 잡지인가를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에게 양도하여 친목회의 기관지로 변경하여 발행되었다. 1918년 3월 도쿄에서 발간된 2호는 친목회의 편집부장인 김덕성이 편집 겸 발행인이었으며 이후 황애시덕(黃愛施德, 황에스터)으로 변경되었다가 4호는 주관자가 여자흥학회로, 편집 발간은 여자유학생회로 변경되었다. 제6호는 유영준이 발행인으로 변경되어 잡지 발행의 어려움을 확인할 수 있다.
숭의여자중학교 동창회 잡지부의 『여자계(女子界)』 창간 경위는 확인되지 않는다. 창간호 이후 잡지인가권을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에 양도한 것은 잡지의 영향력 확대를 기대한 것으로 보인다.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는 1917년 10월 17일 임시 총회를 개최해 『여자계』 발간을 만장일치로 결정하고, 이미 창간된 『여자계』의 인가를 양도받았다. 편집부장에 김덕성, 부원으로 허영숙, 황에스터, 나혜석, 편집 찬조로 전영택과 이광수를 선출하여 편집진을 구성하였다. 도쿄에서 유학하고 있던 여학생들이 조선 여자계를 깨워 여성의 자각과 사회개량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잡지 편집 및 발간은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의 회원들이 학업과 병행하면서 발간하였으므로 편집 겸 발행인의 교체가 많았다. 결국 재정적인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제7호를 끝으로 종간되었다.
편집 겸 발행인 김덕성, 인쇄소 복음인쇄합자회사(福音印刷合資會社), 발행소 여자계사로 되어 있다. 제6호에는 판매소로 경성의 광익서관(廣益書館), 블라디보스토크의 윤능효서관(尹能孝書館), 평양 광명서관(光明書觀)으로 되어 있어 서울, 평양은 물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사회에까지 잡지보급을 확대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김덕성은 동경여자고등사범학교 가정과를 졸업한 여학생이며 복음인쇄합자회사는 독실한 일본기독교인이 경영하던 요꼬하마에 소재한 인쇄소로 『여자시론』, 『학지광』, 『기독청년』 등 한국유학생 관련 잡지 다수를 인쇄한 곳이다.
판형은 국판으로 국한문 혼용체를 택하였으며, 분량은 77면 정도였고 정가는 18전이었다. 제2호부터 연 4회씩 발간하는 것으로 개정되었으나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1년에 2호 정도 발간하다 1921년 7호로 종간되었다. 현재 2호와 6호가 남아 있으며 고려대학교 도서관과 아단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제2호 발간 당시 잡지 편집 방침을 가정개량, 아동교육에 둔다고 표방하였지만 가정생활이나 육아 등에 대한 실재 경험이 부족한 학생들이 잡지를 발행함으로 야기되는 문제는 주부들의 협조를 얻어 해결하고자 기획하였다. 즉, 주부들이 가진 실제 경험을 제보해주기를 기대한다는 것과 가정개량과 아동교육을 중점적으로 다루겠다는 편집 방침을 표방한 것은 당시 여성이 당면한 현실 문제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같은 방침에 따라 지면은 가정, 육아, 교육에 비중을 두었지만 그 밖에 수양, 학예, 음악, 미술, 문예(시, 소설) 등으로 다채롭게 꾸며져 있다. 여성을 계몽시키고 각성시키기 위해 비록 도쿄에서 발간되었지만, 도쿄 유학 중인 조선인 여학생은 물론 고국과 해외한인사회의 여성들에게도 잡지가 읽혀지길 기대하였다.
당시 일본에서 유학하고 있던 조선의 여자 유학생들의 인식 수준을 보여 준다는 점에 자료적 가치가 있다. 조선의 여성을 교육 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인식 전환을 요청하는 주장, 일상생활 전반의 개량을 목적으로 하는 신지식의 소개 등에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을 규정하는 근대성의 담론을 엿볼 수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