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2월에 이토 우사부로가 조선가정의 개량과 일반부인의 지식향상을 위해서 창간하였다. 조선통치에 적극 협조하던 일본 언론인이 조선여성을 대상으로 한 여성계몽잡지를 발행하여 주요 대도시에 지사를 두고 잡지보급을 확대하려던 기획을 엿볼 수 있다. 일본남성이 원하는 방향으로 조선여성을 계몽하고자 발행한 유일한 여성잡지지만 2호(1923년 3월) 발행 이후 발간이 지속되지 못하였다.
『매일신보』에 의하면 1923년 2월 11일 조선가정의 개량과 일반부인의 지식향상을 위해 창간하였으며 최영택씨가 경영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잡지의 판권장에는 편집 겸 발행인은 이토 우사부로로 되어 있다. 최영택 역시 언론인으로 부인계에 기사를 싣고 있어 본 잡지에 관여한 것으로 추측된다. 발행인 이토는 요코하마 출신으로 1905년 5월에 한국에 들어와 한글을 습득하였다. 1910년 4월 진남포신보사에 입사하여 조선문 부록 편집주임으로 근무하였다. 이후 조선신문사, 경성일보사, 매일신보 조선어판 등의 편집을 담당해오다가 1926년 4월에 조선사상통신사를 창립하고 일간 『조선사상통신』을 발행하였다. 조선 언론매체와 저술 가운데 주요사항을 일어로 번역하여 일본인들에게 제공하는 등 식민통치를 도운 공로로 두 차례나 총독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편집겸 발행인 이토 우사부로, 인쇄인 이희순(李義淳), 인쇄소 동아인쇄소(東亞印刷所), 발행소 부인계사(婦人界社), 발매소 문창사(文昌社)이다. 판형은 국판으로 여성들이 일기 쉽도록 국문으로 편집하였으며 1부 정가는 20전, 우송료 5리이다. 정기발행일은 매월 15일로 경성에 본사를, 대구·평양·수원에 지사를 두어 판매지역을 넓히고자 하였다. 1923년 2월에 발행된 창간호는 전하지 않고, 1923년 3월 15일에 발행된 제2호가 현재 아단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체제는 목차, 광고, 권두언, 사설, 유명 국내외 지식인들의 여성관련 글로 구성하였다. 「재가한문독습」이란 기사를 실어 스스로 한자를 익힐 것을 권장하였고, 또 시, 투서함, 세계 부인의 특색 글 등이 기획되어 게재되었다. 문체와 장정, 표기방식, 사상 등은 시대착오적이고 구태의연하지만, 당시 여성들의 관심사인 경제적 독립, 가정개량, 육아, 연애와 결혼문제를 다루고 있다. 일본인 발행의 여성잡지로, 본문 중에서 편집주체, 필자, 독자들 모두 민족경계 없이 한덩이로 ‘우리조선, 우리부인’ 식의 ‘우리’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어 흥미롭다. 다만 조선문 강습, 한문 강습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한편으로는 조선에 거주하는 일인들을 독자로 상정하고 있는 듯도 보인다.
식민통치에 적극 협조하여 표창 받은 조선전문가인 일본 언론인이 발행한 여성잡지로, 일본인들이 한국에서 의도했던 잡지발간의 목적을 알 수 있다. 또 민족경계가 약화되는 측면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