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12월 한몌례의 주도 아래 여성들의 계몽과 사회 참여를 진작시킬 목적으로 창간하였다. 1930년대 여성들의 사회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지식확충에 비중을 두어 발행하였지만 경영상의 어려움으로 1932년 5월에 4호를 마지막으로 후속발행 여부가 확인되지 않는다. 한편 1930년대 발행된 동일한 이름의 잡지로 1936년 5월에 사해공론사(四海公論社)에서 창간한 『부인공론』이 있다. 또 일본 동경의 중앙공론사에서 1916년 1월에 창간하여 식민지 조선에도 보급되었으며, 현재도 발행되고 있는 『부인공론』도 있다.
1931년 12월 이화여중 출신의 한몌례가 중심이 되어 여성의 사회적 활동을 충실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여성들의 내면적 확충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여성들의 내적 지식교양을 높이기 위한 여성잡지의 발간을 추진하였다. 발행인 한몌례는 다년간 언론계에 종사하면서 『부인공론((婦人公論)』의 창간에 참여하여 편집인으로 활동하였지만 4~5개월 정도만 잡지발행에 관여하였다. 이후 한몌례의 행적은 1934년 경성의 사회사업기관인 동일자혜원(東一慈惠院)에서의 활동만 확인된다. 경영상의 어려움으로 1932년 4월호까지만 발행된 것은 아마도 잡지발간의 중심인물인 한몌례의 진퇴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저작 겸 발행인 한몌례, 인쇄인 김윤식(金潤植), 인쇄소 부인공론사인쇄부, 발행소 부인공론사다. 판형은 국판(148㎜×210㎜)으로 국한문혼용체로 편집되었고, 분량은 100~120면 정도이며, 잡지 가격은 20전이다. 특대호의 경우는 50전이며, 우송료를 받아 우편배송도 가능하였다. 현재 독립기념관(1932년 4월호) 및 아단문고(1932년 5월호)에 일부가 소장되어 있다.
부인공론사 발행의 『부인공론』 창간호는 남아 있지 않지만 창간호에는 「양성대립사회」, 「세계여성과 조선의 여성」, 「농촌과 부인생활」 등의 기사가 실려 있어 창간사에서 밝힌 대로 여성들의 계몽과 사회 참여를 진작시킬 목적에 걸맞는 내용을 주제로 하고 있다. 1932년 5월호에 실린 기사 중에 「조선이 부르는 신여성(新女性)은」, 「거드름급여성(級女性)을 타매(打罵)함」, 「강제결혼에 대하야」, 「뿌르조아지들의 축첩생활(蓄妾生活)을 배격(排擊)함」, 「여성운동(女性運動)의 회고와 전망」, 「여성해방(女性解放)에 대하야」 등 여성운동이나 여성해방 관련 주제 및 세계여성들의 활동상도 다루고 있다.
여성의 사회적 활동을 충실히 하는데 필요한 지식의 확충을 중시하면서 여성들의 계몽과 사회 참여를 진작시키고자 시도한 점이 주목된다. 덧붙여 둘 것은 1932년 5월호에 게재된 사고의 내용, 즉 부인공론사에서 일본 도쿄의 동양통신사(東洋通信社)와 오사카의 만선통신사(滿鮮通信社)를 광고대리부로 지정해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부인공론사가 일본과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하는 바이므로 검토가 필요한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