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린 ()

최린
최린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종법사, 도령 등을 역임한 천도교인. 언론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칭
이칭
고우(古友), 여암(如菴), 가야마 린(佳山麟)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78년(고종 15) 1월 25일
사망 연도
1958년 12월
본관
해주(海州)
출생지
함경남도 함흥
관련 사건
3·1운동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일제강점기 종법사, 도령 등을 역임한 천도교인. 언론인, 친일반민족행위자.
개설

1878년 1월 25일 함경도 함흥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해주(海州), 호는 고우(古友), 도호(道號)는 여암(如庵)이고, 아명은 바우[金岩]였다. 아버지는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최덕언(崔德彦)이다. 일제강점기에 3·1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되었으며, 보성학교 교장, 천도교 도령, 중추원 참의, 매일신보사 사장 등을 지냈다. 1950년 한국전쟁 중 납북되어 1958년 12월 평안북도 선천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려서 한학자 도필두(都必斗)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1895년 처음 상경해 어지러운 시국으로 인해 각지를 유람하였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한국인들이 조직한 일심회(一心會)에 가입했다가 일심회 관련자에 대한 내사가 시작되자 1902년 3월 일본 오사카로 건너갔다. 이때 일본에 망명 중이던 동학 3대 교주 손병희(孫秉熙)를 이진호(李軫鎬)의 집에서 처음 만났다. 이후 일심회 관계자의 석방 소식을 듣고, 7월 귀국해서 8월 외부주사(外部主事), 길주감리서 주사로 임명되었다. 1903년 9월 서울에 가서 입신양명하라는 부친의 권유로 서울로 올라왔다.

1904년 10월 대한제국 황실에서 보내는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최남선(崔南善) 등 44명과 함께 일본으로 갔다. 11월 도쿄부립제일중학교 속성과에 입학하였는데, 이때 일본유학생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으며, 1905년 11월 유학생을 규합하여 동맹휴교를 주도했다. 1906년 9월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에 입학하면서부터 1907년 2월까지 대한유학생회 부회장과 회장을 역임했다. 1907년 광무학회 총대와 태극학회 총무원·평의원, 1908년 대한학회 회장, 1909년 대한흥학회 평의원과 부회장을 역임했다. 1909년 7월 메이지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그해 9월 귀국했다.

1910년 봄 경성에 있는 각국 공관에 방화하려던 계획이 발각된 후 10월 손병희를 찾아가 정식으로 천도교에 입교했다. 천도교단에서 보성학교를 인수한 후인 1911년 2월 보성중학교 교장에 취임하였으며, 교장으로 재임하면서 보성전문학교와 휘문의숙에서 강사로 활동했다.

1919년 3월 조선민족대표의 한명으로 3·1독립선언에 참여해서 일약 사회적 지도인사로 부상했다. 3년간 옥고를 치르고 1921년 12월 출소해 1922년 1월부터 천도교 중앙교단에서 서무과·교육과 주임으로 선출되어 교단활동을 시작했다. 6월 1회 조선미술전람회 제1부 동양화부에 「난(蘭)」을 출품해 입선했다. 9월 천도교 종리사(宗理師)로 위촉되었고, 12월 천도교 만화회(萬化會) 창립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3년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중앙부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9월 동경지방이재조선인구제회(東京地方罹災朝鮮人救濟會) 발기인 및 상무위원, 1924년 조선기근구제회 위원으로 활약했다. 1925년 천도교 종리사에서 종법사(宗法師)로 선임되었고, 그해 조선체육회위원, 1926년 조선문헌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7년 6월부터 1928년 4월까지 미국과 유럽 21개국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1929년 천도교 교단 최고직인 도령(道領)에 올랐다. 그해 10월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인, 1930년 7월 전조선수재구제회(全朝鮮水災救濟會) 위원으로 활동했다. 1931년부터 1936년까지 천도교 교단 고문으로 재임했다. 1931년 단군신전봉찬회 이사, 1932년 나예방협회(癩豫防協會) 발기인, 1934년 1월 조선소작령제정촉진회 발기인, 4월 여자의학전문학교 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34년 4월 조선총독 자문기구인 중추원 칙임관 대우 참의에 임명되어 1938년 4월까지 매년 1,8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34년 8월 시중회(時中會) 결성에 참여해 이사로 선출되었다. 1935년 조선총독부의 식민통치 25주년을 기념하여 「민심의 융화가 통치 대근간(大根幹) 장래에의 기대가 더욱 크다」(『매일신보』 1935.10.1.)라는 축사를 썼다.

1936년 11월 ‘조선인 징병제 요망운동’ 발기인으로 참여해 조선에 징병제 실시를 촉구했다. 1937년 4월 천도교 중앙종리원 상임현법사(常任玄法師)로 선출되어 시국강연과 집필활동을 통해 천도교인의 전쟁협력을 독려했고, 7월 중추원에서 주관하는 시국강연회 강사가 되어 전라도 일대를 순회하며 중일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8월 조선총독부에서 ‘시국인식의 주지철저’를 위한 시국강연회에서 이돈화(李敦化)와 함께 편성되어 7일부터 18일까지 평안북도 일대에서 강연했고, 같은 달 조선신궁에서 거행하려는 국위선양기원제(國威禪讓祈願祭) 준비회 발기인으로 참여해 위원에 선출되었다. 중일전쟁을 미화하는 내용의 「동양평화의 대정신, 내선일체로 국민적 적성 발휘」(『매일신보』 1937.8.15.)와 「시국인식을 철저히 하자」(『신인간』 1937.9.)라는 글을 기고했다.

1938년 2월 평안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시국강연을 했고, 조선인징병제가 공포되자 이를 경축하는 조선지원병제도 제정 축하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4월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가 주식회사 매일신보사로 전환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해 취체역 사장으로 취임해서 1941년까지 재임했다. 1938년 6월 국민정신총동원연맹 발기인·이사·상무이사, 9월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 10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하는 제1회 생활개선위원회에서 비상시 국민생활개선위원회 제1부 위원(의식주 부문)으로 선임되었다. 11월에는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국민정신 작흥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강연했고, 12월 인일기념강담회(人日紀念講談會)에서 ‘신앙 보국주의와 신동아건설’을 강조했다. 같은 해 저축장려위원회 위원, 시국대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1939년 10월 조선유도(儒道)연합회 상임이사로 선임되었고, 같은 해 배영동지회(排英同志會) 상담역, 동양지광사(東洋之光社)·경성과학지식보급회 고문·경성부 육군병지원자 후원회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1940년 중앙협화회(中央協和會) 평위원, 재만조선교육후원회 위원으로 참여했으며, 2월 기원 2600년 축전 기념식전 및 봉축회에 참석해서 그 소감을 「봉축 황기(皇紀) 이천육백년」(『매일신보』 1940.2.11; 2.13.)이라는 글로 밝혔다. 7월 「지원병 10만 돌파 지원명 모매(母妹)에 보내는 글」(『삼천리』 1940.7.)과 9월 「대동아공영권 수립과 고도국방」(『삼천리』 1940.9.)을 기고해 지원병을 장려했으며, 10월 국토계획위원회 위원,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와 총무부 기획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 천도교단에서는 1940년 천도교총부 장로에 올라 1945년까지 재임했다.

1941년 다시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어 해방될 때까지 재임하면서 매년 2,400원의 수당을 받았다. 6월 중추원에서 주관하는 부여신궁공사(扶餘神宮工事) 근로봉사에 참여했고, 8월 흥아보국단 상임준비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같은 해 임전대책협력회에서 ‘애국채권’을 가두에서 판매했고, 9월 조선임전보국단 창립준비위원·발기인과 10월 단장으로 선출되었다. 11월 조선인 지원병수련생 1,232명의 수료식에 참석했고, 「읍소」(『삼천리』 1941.11.)라는 글을 통해 전쟁참여를 독려했다.

1942년 조선임전보국단에서 주최하는 각종 징병제 관련 행사에 참석했고 「있는 힘을 다 바치자」(『매일신보』 1942.5.10.)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해 정학회 고문으로 선임되어 황도사상 보급에 앞장섰다. 1943년 「양양하다 반도의 앞날, 충효일본(忠孝日本)의 대도(大道)로 나가자, 열혈 청년들」(『매일신보』 1943.12.8.)이라는 글을 써서 학병지원을 촉구했다. 1944년 국민동원총진회(國民動員總進會) 고문, 1945년 6월 조선언론보국회 회장에 임명되어 각종 대회를 주도하여 해방 때까지 친일 활동으로 일관하였다. 해방된 후 1949년 1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세 차례 공판을 받았고 그해 4월 보석으로 풀려났다.

최린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9·11·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7: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741∼831)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1902.8.7.)
『황성신문(皇城新聞)』(1909.3.16.)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7: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친일인명사전』3(민족문제연구소, 2009)
『독립운동사자료집』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삼·일운동실록』(이용락, 삼·일동지회, 1969)
『3·1운동비사』(이병헌, 시사시보사, 1959)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www.koreanhistory.or.kr)
집필자
이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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