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원주(元周). 호는 일엽(一葉). 평안남도 용강 출신. 아버지는 목사(牧師) 김용겸(金用兼)이다.
아버지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관계로 20대까지는 교회에 다니며 성장하였다. 그는 기독교 문화의 영향을 받아 일찍 개화하였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구세학교(救世學校)와 진남포 삼숭학교(三崇學校)를 거쳐 서울 이화학당에서 수학하였다.
또한 일본에 건너가 닛신학교[日新學校]에서 수학하였다. 1920년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잡지 『신여자(新女子)』를 창간하여 스스로 주간이 되기도 하였으며, 동아일보사 문예부기자, 『불교(佛敎)』지의 문화부장 등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기독교신자였으나 1928년 만공선사(滿空禪師) 문하에서 득도 수계(受戒)하고 불교 신앙으로 전향하게 되어 만공이 있던 예산 수덕사(修德寺)에 입산, 수도하는 불제자로 일생을 마쳤다.
문학 활동은 1920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활동하였던 문학 영역은 시 · 소설 · 수필 등의 분야이다. 1920년 자신이 주간으로 있는 『신여자』 3월호에 소설 「계시(啓示)」를, 4월호에 「어느 소녀(少女)의 사(死)」를 발표하였다. 1921년 1월 『폐허』 2호에 「먼저 현상(現象)을 타파(打破)하라」는 등의 글을 발표하였다.
같은 해 『신민공론』의 편집동인이 된 후 「단장(斷腸)」( 문예시대, 1927.1.) · 「애욕(愛慾)을 피(避)하여」( 삼천리, 1932.4.) · 「오십전은화(五十錢銀貨)」(삼천리, 1933.1.) 등의 단편을 발표하고, 수필과 시론도 썼다. 또한 문학 활동을 하는 한편, 나혜석(羅蕙錫) · 김명순(金明淳) 등과 함께 자유연애를 부르짖고 여성의 자유와 개방을 추구하며 지위향상운동을 폈다.
작품으로는 소설에 「계시」 · 「자각(自覺)」 · 「순애의 죽음」 · 「사랑」 등이 있고, 시에 「추회(秋懷)」 · 「이별」 · 「동생의 죽음」 등과 수상록 『청춘을 불사르고』(문선각, 1962) · 『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휘문출판사, 1965) 등이 있다.
그의 문학적 특성은 예술성보다도 주제에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에 작품 자체는 그다지 높이 평가할 만한 것은 못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 근대문학 초기에 여성으로서 대담한 사회활동과 아울러 남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작품 활동을 함으로써, 오랫동안 폐쇄된 규범 속에 묻혀 있어야 하였던 우리나라 여성들이 사회 진출과 문학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는 점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