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두(蔟兜) 또는 족관(蔟冠)이라고도 한다. 겉을 검은 비단으로 싼 여섯 모가 난 모자로 위가 넓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좁다. 속에는 솜이 들어 있고 그 가운데를 비게 하여 머리 위에 올려놓는다. 족두리라는 말은 고려 때 원나라에서 왕비에게 준 고고리(古古里)가 와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족두리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원나라와의 혼인이 많았던 고려시대 후기로 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족두리는 조선시대의 것보다 모양이 크고 높이도 높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그 양식이 점차 작아지고 위와 아래가 거의 밋밋하게 비슷하여졌다.
광해군 때에는 현금(玄錦)으로 거죽을 하고 자주색으로 안을 하였다. 그 이후로 국내의 부녀들이 즐겨 써서 거의 국속(國俗)이 되었으며, 특히 영조·정조시대에는 가체(加髢)를 금하면서 족두리의 사용을 장려하였다.
1788년(정조 12)에는 머리를 틀어 쪽찌고 머리 위에 족두리를 쓰게 하였는데, 그 족두리를 만드는 데에는 면서(綿絮)나 양죽(凉竹)을 검은색으로 하고 칠보 등을 지나치게 쓰지 못하도록 금제령을 내렸다. 아울러 일반의 혼례 때에도 칠보족두리를 빌려 쓰지 못하게 금지하였다.
부녀의 족두리 위에는 남편의 관직에 따라 금권자(金圈子)나 옥권자를 붙여서 등위를 표하였다. 족두리에는 장식이 없는 민족두리와 족두리 위에 옥판(玉板)을 받치고 산호주(珊瑚珠)·밀화주(蜜花珠)·진주 등을 꿰어 만든 꾸민족두리가 있다. 또, 솜족두리라 하여 어여머리를 꾸밀 때 쓰는 것도 있는데, 이것은 어염족두리라고도 한다.
이 밖에 상제(喪制)가 쓰는 흰색의 족두리가 있는데, 이는 장식을 하지 않고 납작한 모가 난 모자와 같은 양상이다. 족두를 만들자면 모단 다섯 치와 솜 한 냥 반이 든다. 족두리는 현재까지도 신부가 신식 혼례를 마친 뒤 폐백을 드릴 때 원삼과 같이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