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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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이 착용하는 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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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군복은 군인이 착용하는 제복이다. 군인들의 소속감과 구분을 위한 상징적인 의복이다. 군복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입었는데 1895년에 서구식으로 개혁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미 군복을 공급받으면서 한국 군복이 미국과 흡사해졌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초까지 군복 제도가 정립되고, 군복의 디자인도 변화했다. 이 시기에 한국의 군복이 국산화되어 국가적인 특징을 가지게 된 것이다. 1980년대에는 한국적인 특징을 강조한 얼룩무늬 군복이 도입되었다. 얼룩무늬는 낮에는 주위에 잘 띄지 않고 밤에는 적외선 장비로부터 구별되지 않게 한다.

목차
정의
군인이 착용하는 제복.
내용

군복은 군인을 다른 집단과 구분해 주며,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집단에 대하여 소속감을 갖게 하는 상징적 기능을 가진다. 전투복인 갑주(甲胄)나 비상시에 문관이 입는 융복(戎服)도 군복의 범주에 든다고 할 수 있다.

문헌에 보이는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 권40 잡지 직관조에 보이는 것으로, 무관은 소속에 따라 깃의 색을 달리하였다. 녹금서당(綠衿誓幢)의 경우는 깃의 색에 녹색과 자색을, 자금서당(紫衿誓幢)의 경우는 자색과 녹색을 사용하는 등 자 · 비(緋) · 녹 · 청 · 황 · 적 · 벽(碧) · 흑 · 백 등의 색채표지를 사용하였는데, 그 형태는 반달모양이라고 하였다.

초기에는 신라의 제도를 따랐으나 983년(성종 2)에는 복색을 새로이 제정하였고, 1167년(의종 21)에는 부병(府兵)의 복장을 자의(紫衣)로 제정하여 착용하게 하기도 하였다. 『고려도경』에 나타난 중앙군의 직제 가운데 직급별 군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상륙장군(上六將軍):갑주를 입는데 허리 아래에는 오채수화(五彩繡花)로 장식된 10여 개의 띠를 드리웠다. ② 의장군(儀仗軍):절각복두(折角幞頭)나 금화대모(金花大帽)를 쓰고, 의복은 구문금포(毬文錦袍)에 도금띠 또는 붉은 무늬가 있는 비단옷에 흑서대(黑犀帶)를 띠었다.

③ 기병(騎兵):무늬 있는 비단모자와 자색 비단 전포(戰袍)에 흰 바지와 짚신을 신었다. ④ 수군(水軍):황색 사로 반조(盤鵰)를 수놓은 청포착의(靑袍窄衣)를 입고 붉은 가죽에 구리로 장식한 띠를 띠었다. 이와 같은 제도는 주로 왕성을 수비하고 임금을 호위하는 근왕병의 의식용 복식이며, 유사시 출전하는 전투복은 갑주가 위주였다.

1377년(우왕 3) 화통도감(火㷁都監)이 설치되고 과학기술무기인 화포가 점진적으로 발전됨에 따라 군복도 행동에 둔중한 의복보다는 경쾌한 의복으로 개선되었다. 1406년(태종 6)에는 각 도의 지방군 복장이 청색방의(靑色防衣)로 새로이 제정되었고, 이어 1425년(세종 7)에는 시위군사(侍衛軍士)의 복장으로 행동에 민첩하고 경쾌한 철릭[帖裏]을 착용하게 하였다.

그 뒤 1491년(성종 22) 여진정벌을 위하여 출정하는 사병의 군복은 그 길이를 짧게, 소매는 좁게 하는 한편, 가슴에는 소속위를 나타내는 장표(章標)와 모자에는 초기(肖旗)를 꽂도록 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그대로 이어져 임진왜란 때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도 삼도수군에게 호의(號衣)를 입게 하여 그 소속을 표시함으로써 지휘에 편리하게끔 하였다.

임진 · 병자 양란이 경과한 뒤에는 군복의 간편화에 대하여 강조된 바 있으니, 1648년(인조 26)과 1655년(효종 6)에는 군인들의 소매넓이를 줄이고 옷길이를 짧게 하였다. 특히 효종은 위졸(衛卒)들의 의복을 선명하고 화려하게 하기 위하여 비단을 입는 것을 허락하는 특전을 주기도 하였다.

1743년(영조 19)에는 금위영어영청의 보병도 호의를 입도록 제정하였다. 1793년(정조 17)에는 이제까지의 제도상 군복은 융복과 군복으로 구분되었으나 융(戎)과 군(軍)은 그 뜻이 동일하므로 융복을 폐지하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철릭은 구제(舊制)이기 때문에 버릴 수 없다고 하여 그대로 당상관은 자립(紫笠) 또는 칠사립(漆紗笠)에 남색 철릭을, 당하관은 흑립(黑笠)에 청색(동가시는 홍색) 철릭을 착용하도록 하였다.

구군복(具軍服)동달이 직령포(直領袍)로서 양옆 겨드랑이와 등솔기 하부는 트인 것으로 그 위에 전복을 입으며, 허리에는 광대(廣帶)와 전대(戰帶)를 띠었다. 머리에는 전립(戰笠)을 쓰고 그 정개(頂蓋:윗덮개)에는 직위를 표시하는 도금 · 조금(雕金) · 순은 · 종결(鬃結) · 목각 등의 증자(鏳子)와 상모(象毛)를, 그리고 아래 안땀대 좌우 밑으로는 패영(貝纓)을 드리웠다. 그 뒤 1812년(순조 12)에 훈국병마(訓局兵馬)의 전립은 전우(轉羽:象毛)로써 방색(方色)을 구별하여 대오를 정제했다.

1895년(고종 32) 4월 9일 칙령의 반포에 의하여 조선시대의 융복 · 구군복 등 재래식 군복이 서구식으로 개혁되었다. 이 시행령은 처음에는 훈련대 보병과 장교에게만 국한하여 적용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같은 해 8월 6일에 군부 내 무관과 상당관(相當官)에게도 적용시키는 한편, 같은 달 16일에는 외국 유학 군인에게도 착용하게 하였으며, 이어 같은 해 9월 5일에 이르러 비로소 일반 군인에게까지도 착용하도록 조처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897년 5월 15일 「특하육군복장규칙」이 제정되었는데, 이는 최초 제정 당시의 제식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1895년 시제 당시에는 예복상복(常服)의 구별이 없었으나, 1897년 「육군복장규칙」 제정 때부터 예복은 의식 때, 상복은 평상시에 착용하도록 하였으며, 1899년 6월 22일 원수부관제가 제정된 다음부터는 황제도 군복을 착용하게 되었다.

그 뒤 1900년 3월 22일 「육군복장규칙」이 개정되었고 같은 해 7월 2일의 조칙에 의해 예복의 모양이 바뀐 것을 비롯하여 1907년 10월 1일에는 전반적인 정비가 이루어졌다. 그 해 7월 31일의 군대해산으로 말미암아 사실상 군의 명맥이 끊어지게 되었으며, 1910년 8월 22일 경술국치대한제국의 군 복제사는 중단되고 말았다. 따라서 개화기 이후 군복에 대하여 1895년 제정된 복식과 1897년 이후 제정된 예복 · 상복으로 대별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1895년 4월 9일 제정된 군복

처음 제정 당시에는 예복 · 상복의 구분이 없었으므로 모자도 단일형으로 흑색 융단에 위는 좁고 아래로 퍼진 둥글린 투구형이었다. 정상에는 화살촉 같은 금색 쇠를 부착하고 이뉴(頤紐:턱끈)는 전비(前庇:군모 앞의 차양)와 더불어 검정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후면에 규모는 작지만 앞과 같은 형으로 차양을 부착하였다. 그리고 정면표장(正面表章:모표)은 무궁화 가지를 서로 어긋 묶어 그 위에 이화장(李花章)을 하였다.

상의는 겉감을 흑색 나사로 하여 앞가슴 가운데에서 여며지는 합임식이었는데, 무늬 없는 단추 다섯 개를 달았고, 가슴 좌우상하에는 덮개 없는 주머니를 달았다. 의령장(衣領章)은 은제 별을 깃 전면 좌우에 붙였다. 수장(袖章)에는 금색 선을 두르고 소맷단과 금사 중앙에 은색 태극단추를 달았다. 견장(肩章)의 머리 부분은 능형, 아래는 장방형으로 그 위에 은제 별을 달았다. 바지는 흑색 융(絨)이며, 봉장(縫章:좌우 정중에 표시한 관등의 색)은 적색 융으로 장관 3조, 영관 · 위관 1조로 하되 너비에 차이를 두었다.

(2) 1897년 5월 15일 이후 제정된 군복

① 예복:모자는 흑색 융이며 정개는 타원형으로 중심부에는 별도로 홍색 융 위에 이화문을 금사로 수놓았고, 그 외변에는 금선양고직(金線兩股織)으로 둘렀는데, 계급에 따라 조를 달리하였다. 상의는 겉감이 흑색 융단이며 또한 가슴 가운데에서 여며지는 합임식이었는데, 깃이나 아랫단에는 흑사광직(黑絲廣織)을 둘렀고, 가슴 좌우에는 흑색원직(黑色圓織)으로 무궁화 매듭을 결어 달았으며, 단추는 매듭단추와 고리를 달았다. 그리고 좌측허리 아랫부분에는 칼을 차는 데 편리하도록 할개(割開)하고, 표면에는 흑사광직을, 안쪽에는 검정색 가죽을 둘렀다.

깃은 겉감은 홍색 융단으로 하여 가장자리에 금색실로 수놓았다. 소맷부리에는 홍색 융연을 수장 부분 밑에까지 두르고, 그 위로는 인자형(人字形)으로 하여 금색 사로 수놓아 계급에 따라 조를 달리하였으며, 인자형 최상에는 금사로 무궁화를 수놓았다. 견장은 금사광직으로 상두장방형과 하두타원형으로 하여 상두에는 도금제 이화단추를 달았다. 장관은 하두에 금사강직하수(金絲綱織下垂)가 있으며, 그 위에 은사 무궁화 줄기와 꽃,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홍흑의 태극을 수놓았다. 그 좌우에는 은사로 수놓은 별을 대장은 3개, 부장은 2개, 참장은 1개를 각각 달았다.

영관은 무궁화와 태극은 장관과 같으나 그 좌우에 은사로 수놓은 화살을 정령은 3개, 부령은 2개, 참령은 1개를 달았다. 위관은 무궁화는 없고 다만 태극뿐으로 그 좌우에 또한 은사로 수놓은 화살을 정위 3개, 부위 2개, 참위 1개를 달았다. 바지의 감은 상의와 같고 봉장은 장관 3조(좌우 2조 각 7푼, 중앙 1조 3푼), 영관 2조(너비 각 7푼), 위관 1조(너비 1촌), 하사관 1조(너비 6푼), 병 1조(너비 3푼)로 하되, 장관보병은 홍색, 기병은 녹색, 포병은 황색, 공병은 자색, 군사(軍司)는 청색, 군의는 옥색으로 하였다.

1905년 9월 5일부터 군모에 있어 군의관은 유록색으로 개정되고, 1907년 10월 1일부터는 장교의 병과정색(兵科定色)이 제정되어 이에 준하게 되었다. 장관 · 보병은 홍색, 기병은 녹색, 포병은 황색, 공병은 자색, 군의는 유록색, 군사는 청색이었다. 한편 정면표장의 원바탕은 흑색 융으로 타원형인데, 정중에 은선금예이화(銀線金蘂李花)와 그 좌우에 무궁화 가지를 어긋나게 묶은 형태를 수놓았다.

이뉴의 품질은 금사원직으로 좌우를 연결하여 전비 좌우 끝부분에 고정하였는데, 이는 무궁화문양 단추였으나 1907년 10월 1일부터는 이화단추로 개정되었다. 그리고 전비는 흑색 혁제로 계속 사용하고, 입전모(정면표장 위에 꽂는 털)는 1900년 3월 23일부터 사용하였다.

1900년 7월 12일부터는 이제까지의 상의에 있어 합임식을 교임식(交袵式)으로 개정하였고, 이때의 단추는 도금된 무궁화모양으로 하여 좌우에 각 7개씩 달고, 좌우 앞솔기에는 홍색 융을 요선(繞線)하였다. 한편 등솔기를 연한 허리 아래의 후거(後裾)는 약 5㎝를 할개하여 양쪽에는 길이 5촌과 너비 1촌의 흑색 융을 부착하였는데, 위는 좁고 아래는 퍼진 모양이며, 여기에 도금제 단추를 상 · 중 · 하로 달았다.

그 뒤 1907년 10월 1일부터는 옷감과 제식은 종전과 같으나 다만 단추만이 도금제 이화문양으로 개정하였다. 의령의 별은 금색실로 수놓은 것으로 개정하고 나머지는 종전과 같이 하였다. 수구(袖口)는 홍색 융선 위에 금사수선(金絲繡線)으로 정도기자형(正倒己字形)을 수놓았고, 그를 연하여 계급표시인 인자형은 종전과 같이 계급에 따라 표시하고, 소맷부리 뒤쪽에는 도금제 무궁화단추 3개를 나란히 달았다.

1907년 10월 1일부터는 모든 제식이 종전과 동일하나, 다만 수장 위의 무궁화와 단추의 무늬는 이화로 하고 소맷부리의 홍색 융단은 병과정색으로 각각 개정되었다. 그 뒤 견장은 1899년 1월 2일부터 영관도 장관과 같이 하두에 하수(下垂)를 늘이게 되었고, 1900년 7월 12일부터는 영관이 사용하던 은사수전(銀絲繡箭)이 은사수성(銀絲繡星)으로 개정되었으며, 위관도 화살로부터 적사수성(赤絲繡星)으로 개정되었다가 1901년 2월 19일로 은사수성으로 개정되었다.

1907년 10월 1일부터는 장관의 은사수성이 금사수성(金絲繡星)으로 개정되었을 뿐 그 밖에는 종전과 같이 되었다. 바지는 1905년 9월 20일 군의가 유록색으로 개정되고, 1907년 10월 1일부터 모든 제식은 종전과 같으나 다만 군의의 봉장은 심녹색으로, 장교의 봉장규격은 장관 3조(좌우 2조 너비 6푼, 중앙 1조 1푼), 영관 2조(너비 각 6푼), 위관 1조(1촌)로 각각 개정되었다.

② 상복(常服):장교용의 경우, 상모(常帽)는 1897년 5월 15일부터 시행되었는데, 형식과 품질은 예모와 동일하되 다만 황금색 양고직 대신에 흑사편직(黑絲匾織)을 하였으며, 정면표장도 예모표장 형태로 도금주제(鍍金鑄製)로 하고 이뉴도 흑사원직(黑絲圓織)으로 하였다. 그 뒤 1906년 5월 1일부터는 정개를 평원형으로 하고 이뉴도 흑색 혁제로 개정하였다. 1907년 10월 1일부터는 품질을 다갈색 평원형으로 하고, 이뉴를 고정하는 단추를 이화무늬로 개정하였다.

그리고 준사관은 장교와 동일한 제식이나 하사관, 즉 정교 · 부교 · 참교용의 형식은 장교와 같으나 다만 관등의 수선과 횡선은 없고 하반부 홍색 융은 양조로 나누어 아래 8푼, 위 2푼으로 하였다. 병졸용은 제식은 같으나 하반부 횡선은 단조 8푼으로 하였다. 그러나 1900년 7월 12일부터 헌병은 하반부를 백색으로, 1902년 9월 2일부터 군악대는 입전모를 꽂고, 그 해 9월 20일부터 기병은 정개와 상반부를 홍색으로 개정하였다. 1907년 10월 1일부터는 장교의 상모와 같이 평원형으로 하고, 정면표장은 도금이화(길이 · 너비 각각 4푼)형으로 하였다.

옷감의 질은 예복과 동일하나 순흑색이고 의령장은 없으며 수장은 흑사직으로 하되 예복수장의 제식과 같게 표시하였고, 1900년 7월 12일부터는 옷감의 질은 흑융질이고 가슴 정중에서 합임하는 식이며 옷깃 상하단에 홍융선 각 1조씩을 요선하며, 의령장은 정면 좌우에 은색실로 별을 장관은 3개, 영관은 2개, 위관은 1개를 각각 수놓았다.

단추는 도금된 무궁화무늬로 합임된 의령으로부터 아래로 7개를 달았고, 등솔기 및 후거분할(後裾分割)된 양쪽에 부착하였던 홍색 융(이는 1897년부터 사용하였음)은 흑융으로 개정하였는데, 이는 예의의 제식과 같다. 그리고 수장도 또한 예의의 제식과 같으나 다만 그 자료는 모두 흑사편직과 흑사직이다. 그 뒤 1907년 10월 1일부터 옷감은 다갈색이며 앞여밈 부분에는 무늬 없는 도금제 원형단추 5개를 달았다. 가슴 및 허리 좌우에는 뚜껑 있는 주머니가 있고, 그 뚜껑 위에는 또한 도금제 소형단추를 각 1개씩 달았다.

한편, 수장은 수단 전면 약 2촌 위에 도금제 이화장을 횡부(橫附)하되, 장관은 3개, 영관은 2개, 위관은 1개인데, 그 위에 각 병과정색 융세선(絨細線) 1조를 부착하며, 또 그 위에 다갈색 사직선(絲織線)으로 대장 · 정령 · 정위는 각 3조, 부장 · 부령 · 부위는 각 2조, 참장 · 참령 · 참위는 각 1조씩 표시하였다. 하사 · 병졸용의 경우 처음 제정할 때에는 장교와 같이 예복 · 상복의 구별이 없다가, 1897년 5월 15일부터 시행되었다.

제식은 장교와 동일하되 단추는 은구(隱釦:무늬 없는 단추)뿐이고, 수장은 홍색을 일자형(一字形)으로 하되 정교(正校)는 수구 쪽으로 5푼 규격 1조와 그 위로 2푼 규격 3조, 부교(副校)는 하 1조 상 2조, 참교(參校)는 하 1조 상 1조로 각각 시조하였다. 상등병은 2푼 규격으로 3조, 일등병은 2조, 이등병은 1조로 표시하였다.

그 뒤 1907년 10월 1일부터 옷감은 다갈색이며 제식은 장교와 동일하고, 수장은 수단 전면 약 2촌 위에 병과정색으로 융세선을 횡부하고 그 위에 다갈색 융조로 계급을 표시하였다. 하사는 광조(廣條) 3푼, 그 위에 정교는 세선(細線) 3조, 부교는 2조, 참교는 1조, 상등병 · 일등병 · 이등병은 광조를 제외하고 계급대로 1조씩 체감하게 하였다.

하사관용 소례견장(小禮肩章)은 흑융질로 머리부분이 팔각반형에다 장방형으로 상변에는 도금제 무궁화단추 1개를 달고, 그 옆으로 황융횡선(黃絨橫線)을 표시하는데 정교는 3조, 부교는 2조, 참교는 1조로 하고, 그 횡선 아래쪽으로는 대호(隊號)를 국문으로 식별하되 황색 융으로 하였다. 그리고 병졸도 하사관과 동일한 형태로 하되 횡융선만 없고 다만 헌병은 ‘헌(憲)’자를 한문으로 표기하였다.

이러한 서구식 복제는 시행된 지 불과 12년 만인 1907년 군대해산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그 뒤 국권회복을 위하여 항일활동이 전개되었고,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1940년 9월 17일 광복군이 창설되었다. 그러나 광복군은 일정한 제복이 없어 사복을 입거나 중국 측 보급품 일부를 착용하기도 하였다. 별동대(別動隊)는 영국 군복을 착용하였다.

광복군의 전투복 차림은 카키(Khaki)색 선직(線織)으로 된 전투모와 스탠 칼라(Stain Collar)에 앞중심에서 단추 5개로 여민 튜닉 형이고 뚜껑이 있는 겉주머니를 양가슴에 붙이고 허리에는 뚜껑이 있는 속주머니를 붙였다. 어깨띠와 허리띠를 차고 각반을 두르고 목이 긴 편상화(編上靴)를 착용하였다. 1945년 2월에 정식으로 군복이 제정되어 정장과 전투장으로 구분하여 착용하게 되었다.

광복 후 1946년 1월 국군의 전신인 남조선국방경비대의 창설 초기에는 일정한 복장 규정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갑자기 군복을 마련할 길도 없어 일본군의 보급 창고에 보관되었던 일본군복을 표식장과 장식품만 임시로 무궁화 계급장으로 바꾸어 착용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사정은 지금과 같이 명확한 규정 아래 통일된 제복만을 착용한 것이 아니고 일본군 제복을 그대로 착용했는가 하면 미군복을 획득하여 착용하는 경우도 있어 착용 상태가 일정하지 못하였다.

그후 미군복을 공급받으면서 군복의 대부분을 미국 원조에 의지하게 되자, 외견상 이때의 군복은 미국과 흡사하였다. 1949년 3월 30일 임시로 제정된 국방경비대의 제복의 상의는 잠바형, 하의는 승마복형에 각반을 차고 Y형 띠를 하여, 윗부분은 미국군과 비슷하고 아랫부분은 일본군과 흡사하여 과도기적인 복장제도였다. 사병도 장교와 같은 복제로 바뀌어 갔는데 군화는 편상화를 신었다. 1950년 6 · 25 전쟁 시절에는 전투복장만을 착용하였던 시기도 있어 군복제사적 관점에서 하나의 정체기라고 할 수 있었다.

전쟁 직후는 대부분을 미국 원조에 의존했던 시기였던 만큼 미군제복이 그 근간을 이루었으며, 복장의 착용 규제도 그때 그때 임시 방편으로 인사지시와 육군회보 등을 통하여 하달되어 왔다. 그러나 1954년부터 이를 종합하여 비록 잠정규정이나마 육군규정으로 규제함으로써 무질서하던 복장제도를 체계화하였으며, 이때부터 완제품으로 도입하던 군복을 과거와는 달리 복지(服地)를 도입하여 우리 나름대로의 제복으로 점차 개발해 나가게 되었다.

특히 1958년 육군규정으로 종전의 미식예복으로 전환하고 새로이 예장(禮裝)으로 서양식 야외복과 만찬복 제식을 제정하였다. 이는 육군복제사상 처음 있는 획기적인 제복이라 하겠다. 이같은 만찬복과 야회복은 비록 모방한 제식(制式)이기는 하나 당시 해외근무장교들과 빈번한 접촉을 갖는 고급장교들에게는 한국군으로서의 자긍을 갖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1960년대부터는 완전 국산품으로 보급하기 시작하였으며, 1961년 5 · 16 군사정변을 계기로 민족주체성이 강조되고 자주적 군복 시대를 지향하게 되었다. 1962년 초까지 각군( 육군 · 해군 · 공군 · 해병대)별로 제복의 제식과 착용에 관한 사항들을 규제하고 독립적으로 시행하여 오던 것을 1962년 각령(閣令)으로 공포 시행하게 됨으로써 군복에 대한 국가적 관심을 한층 격상시켰다. 이는 군복제사적 측면에서 볼 때 중요한 전환점이라 하겠다.

한국인의 체형과 국가적 위상, 경제성, 전투상황 등에 따라 개정되었는데 1965년부터는 컨버터블 칼라(Convertible Collar : 헤치거나 여미거나 깃의 형태를 갖춘 깃)의 군복을 지급하였고, 1967년에는 이를 개정하였다.

개정된 군복은 장교는 오브롱 칼라(Oblong Collar : 스포츠 칼라의 아래 깃을 없앤 모양)로 바꾸고 사병은 견장을 없애고 뒷주머니를 겉주머니로 바꾸었다. 그리고 약모(略帽)는 한국의 사모(紗帽)를 변형시킨 윗부분을 3분할 봉합하여 만들었다. 그러나 파월장병들은 한국전쟁 때 지급한 군복과 비슷한 모양으로 신축성 있는 큰 주머니를 달았고 요철이 있고 땀 발산을 위하여 정글화를 신었다.

1967년부터는 대통령령에 의한 군인복제령이 내려졌다. 기본제복들을 간소화하고 또 실용적인 것으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고조되었으며, 그동안 작업복을 전투복이라 개칭하고 작업모를 약모로 개칭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복제령들은 1959년대의 무질서하던 군복제를 정립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미군복의 영향권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며, 그 단적인 예로서 정복의 색상이 미군복의 유물인 흑갈색과 카키색을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1970년대는 우리의 국가경제도 안정과 고도 성장을 추구하여 끈질긴 노력이 경주되어온 시기로서, 미군의 영향을 벗어나 우리의 체질과 고유의 전통성을 가질 수 있도록 전반적인 군복의 국산화와 단순화를 기하면서 군복의 발전을 꾀하여 온 시기라고 볼 때, 이 이후를 토착화 단계라고 볼 수 있다.

1970년대 초부터는 순수한 한국 복지와 모양으로 군악대 · 헌병 · 여군 · 의장대의 복장을 한국전통식으로 제작하였다. 1971년 상의를 바지 바깥으로 나오도록 하였고 칼라는 다시 컨버터블 칼라로 하고 허리에는 조임 끈을 부착하였다. 그러나 키가 작은 한국인에게 인상이 좋게 보이지 않아 다시 1973년에 개정하기에 이르렀다. 정복과 예복은 1976년쯤부터 방직하게 되었다.

1980년 대통령 제9713호로 공포, 시행하여 한국적 특징을 상징하고 군복으로서의 위엄과 품위를 견지하며 국제적 우위성을 보장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군모는 체모(體帽) · 정모(正帽) · 전투모 및 특수모로 구분하고 제복으로서의 군복은 제복 · 정복 · 근무복 · 전투복 및 특수복과 외투(外套) · 우의(羽衣) · 보조의(補助衣)로 구분하고 있다.

또한 1985년부터 계획하여 1991년 11월 23일부터 전투복 · 전투모 · 야전상의를 수풀지대용 얼룩무늬로 착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한국은 사계절의 환경을 고려하여 흑색 20%, 녹색 30%, 갈색 30%, 모래색 20%를 넣어 만든 복지를 사용하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현대 군복의 세계적인 추세는 낮에는 주위색과 구별되지 않도록 얼룩무늬를 채택하였고 과학적인 염색법으로 실험을 통해서 밤에는 자연에서 나오는 적외선 반사율(反射率)과 의복에서 나오는 반사율을 거의 같도록 하여 적외선 장비로부터 구별하지 못하도록 한 얼룩무늬 군복을 착용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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