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는 삼면이 바다이며 동북아시아의 관문이라는 지정학적 조건으로 인해 예부터 열국분쟁의 초점이 되어 왔다. 이러한 조건과 더불어 분단이라는 정치적 · 군사적 환경 때문에 대한민국 국방은 수륙양면작전을 전개시킬 수 있는 전략 기동부대로서의 해병대 창설이 필요했다. 하지만 당시 신생국가인 대한민국은 정치 · 경제 · 사회적 어려움 때문에 이를 추진할 수 없었다.
그러나 1948년 10월 19일 여수 · 순천 반란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륙양면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해병대의 필요성이 절실히 요청됨에 따라 해군총참모장을 비롯한 군 수뇌들은 해병대 창설을 적극 추진했다.
그 결과 1949년 4월 15일 해군에서 편입한 380명(장교 26명, 하사관 54명, 병 300명)으로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해병대 창설식을 거행했으며, 1949년 5월 5일 대통령령이 공포됨에 따라 법적인 승인을 얻게 되었다.
창설 당시 380명의 병력과 일본식 장비를 가지고 탄생한 해병대는 비행장 격납고를 병사로 사용하는 등 열악한 시설과 여의치 못한 군수 지원 등의 악조건 속에서 시작한 해병대는 1949년 8월 15일 서울에서 거행된 조국광복 제4주년 기념식에 참가해 창설을 처음으로 알렸다.
여수 · 순천 반란사건 이후 지리산으로 잠입한 공산당 유격대들은 진주를 비롯한 주변 일대의 도시와 촌락에 출몰했다. 이에 해병대는 1949년 8월 29일 진주로 이동해 진양군 · 창녕군 · 함안군 일대를 경비하면서 성과를 거둔 뒤, 1949년 12월 28일 제주도로 이동했다.
당시 제주도에는 1948년 4월 3일 폭동을 일으킨 공산당 유격대들이 한라산을 근거지로 관공서를 습격하고 방화하는 등의 사건을 벌이고 있었다. 해병대는 이들을 토벌하면서 4·3사건 이후 피폐한 도민들의 생활 안정과 도내 치안 확보를 맡았다.
1950년 6월 25일 제주도에서 한국전쟁을 맞이한 해병대는 서해안으로 남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1950년 7월 15일 고길훈(高吉勳) 부대를 제주도에서 출항시켰다.
1950년 7월 16일 군산에 입항해 장항 북방까지 진출한 해병대는 그 해 7월 17일 남하하는 북한군과 조우해 7시간의 치열한 전투를 감행하는 처녀작전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1950년 7월 31일 진주를 점령한 북한군이 유엔군의 최후 보루인 부산과 진해에 위협을 가중시키기 위해 마산 방면으로 침입함에 따라 그 해 8월 3일 김성은(金聖恩) 부대는 진동리로 출병해 북한군 대부대를 궤멸시키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에 1950년 8월 5일 국군 중 최초로 대통령으로부터 부대장 이하 전 장병이 일계급 특진을 하는 영예를 차지했다.
그 해 8월 17일에는 북한군이 진해와 마산 등 병참기지와 군항을 봉쇄하기 위해 통영을 점령함에 따라 한국 해군 함정의 지원 · 엄호 하에 통영반도에 기습상륙작전을 감행해 북한군의 대부대를 일거에 포위 · 섬멸했다. 또한 통영반도를 사수하는 등 연이은 승리를 거두었다.
1950년 8월 낙동강 전선에 방어진을 구축해 지연작전에 종지부를 찍은 유엔군은 총 반격작전을 전개하기 위해 그 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게 됨에 따라 해병대는 제주도에서 1개 연대규모로 증편해 9월 6일 부산으로 이동했으며, 국군 중에서 유일하게 유엔군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에 가담했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해병대는 인천시가지에 남아 있는 북한군을 소탕한 뒤, 서울로 진격해 1950년 9월 27일 전쟁 발발 90일 만에 중앙청 옥상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9월 28일 서울을 완전 수복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서울 탈환의 선봉부대로서 임무를 완수한 해병대는 서울 경계임무를 육군 제17연대에 인계하고, 1950년 10월 27일 원산에 상륙해 함흥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유엔군의 흥남철수작전과 병행해 그 해 12월 15일 일시 진해로 철수했다.
해병대는 진해에서 부대를 정비, 보강한 뒤 1951년 1월 24일 동부 전선으로 출병해 경상북도의 영덕 · 안동 · 영주 지구와 강원도의 영월 · 홍천 · 화천 등을 점진적으로 확보하면서 6월 1일 양구 서남방까지 북진했으며, 6월 19일에는 양구와 인제 사이에 있는 태백산맥 중 가장 험준한 산악지대에 있는 도솔산을 탈환했다.
한국 해병대는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미 해병대가 성공하지 못한 도솔산 공격작전을 맡아 16일 간의 치열한 공방전을 감행해 1개 연대의 병력으로 2개 사단 병력의 적을 궤멸시키고 도솔산을 완전 점령함으로써 전술의 원리원칙을 깨뜨린 전승 기록을 다시 수립했다.
도솔산 전투에서 그 용맹을 국내외에 알린 해병대는 중동부 전선에서 가장 험준한 산악지대에 있는 924고지와 1026고지(일명 김일성고지 및 모택동고지)를 악전고투 끝에 9월 3일 완전 점령해 내금강을 감제할 수 있는 발판을 구축함으로써 해외에서도 그 전투력을 높게 평가받았다.
또한, 1951년 2월 14일 동해안의 여도를 확보한 이래 원산만 해상에 있는 9개 도서와 서해안의 초도 · 석도 등 5개 도서를 차례로 확보해 해안선을 통한 적의 보급과 이동을 봉쇄하던 해병대는 그 해 8월 28일 함경북도 성진 동북방 양도에 상륙해 해안봉쇄선을 연장하고 북한군의 후방을 위협하는 동시에 차기작전에 대비했다. 1952년 2월 29일에는 양도를 탈환할 목적으로 기습적으로 대거 내습해 온 북한군 1개 대대의 병력을 불과 1개 중대의 병력으로 섬멸하기도 했다.
한편, 1952년 3월 17일 중동부 전선에서 서부 전선으로 이동한 제1연대는 1951년 2월 16일부터 김포반도를 방어하고 있던 제5대대와 함께 수도 방위의 중책을 수행하면서 서부 전선의 장단 · 사천강 · 연천 · 김포 등 각 지구에서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1년 4개월간 적의 침공을 완전히 저지하는 치열한 고지쟁탈전을 감행했다.
이와 같이 1950년 7월 17일 처음으로 북한군과 교전한 이래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만 3년간 30여 개의 전선을 전전하면서 전투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북한 및 중공군 사살 2만 3909명, 귀순 및 포로 1783명, 부상 1만 3727명 등 3만 9419명의 인적 손실을 입히고, 탱크 · 야포 등을 비롯한 대소화기와 장비 등 3만 4423점의 물적 손실을 입히는 혁혁한 전과를 올리면서 ‘귀신잡는 해병’, ‘임전무퇴의 해병’ 등 수많은 무용담을 남기고 ‘상승해병’의 전통을 수립했다.
이상에 열거한 전투 중 상륙작전인 통영상륙작전과 경인지구작전(인천상륙작전 및 서울탈환작전 포함), 산악지구작전인 도솔산지구 전투와 924고지 및 1026고지 전투, 그리고 도서방어작전인 양도대첩 등은 국군 전사에 빛나는 해병대 5대 작전으로서 해병의 전통으로 상징되고 있다.
베트남전이 일어나고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이 결정됨에 따라 1965년 3월 해병 독립공병중대가 창설되어 베트남에 파병되었고, 그 해 9월에는 전투부대인 제2여단(청룡부대)가 창설되어 그 해 10월 파병되었다.
부산을 출항해 1965년 10월 9일 베트남의 캄란만에 상륙한 청룡부대는 언어와 풍속 및 지리에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해병대의 용맹성과 한국전쟁에서 얻은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해병들의 눈부신 성과 이면에는 조국의 명예와 베트남의 자유 · 평화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던진 숱한 영웅들이 있었다.
1966년 8월 이인호(李仁鎬) 소령은 1개 소대를 인솔해 동굴을 탐색하다가 갑자기 동굴 내부로부터 날아온 수류탄을 가슴에 안고 폭사해 뒤따르던 부하들을 무사히 구출하고 젊음을 아낌없이 내던져 국군의 이념을 몸소 실천했다.
또한, 1967년 2월 1일 적의 해안기지인 바타칸반도에서 북베트남의 대부대와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던 중, 위생하사관으로서 많은 부상자를 치료하다가 자신마저 중한 부상을 입어 움직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가오는 적 20여 명을 단신으로 사살했으나, 끝내는 중과부적으로 전사한 지덕칠(池德七) 중사의 이야기 등 끝없는 무공담들이 있다.
그리고 그해 2월 15일 베트남 중부 쾅이시 북쪽의 ‘자빈동 전투’에서는 청룡부대 제11중대가 월맹정규군 2개 연대와 지방게릴라 1개 대대의 인해전술에 의한 야간 기습공격을 받고 4시간 동안 육박전으로 진지를 사수한 끝에 북베트남 대부대를 저지, 섬멸시키기도 했다. 이에 당시 외신기자들은 ‘신화를 남긴 해병’이라고 대서특필로 격찬했으며, 또 하나의 해병 전통을 수립했다.
이 전투의 전공으로 제11중대는 미국 대통령과 한국 대통령의 부대 표창을 수상하고 제11중대 전원(장교 제외)은 일계급 특진했으며, 제11중대장과 제1소대장은 태극무공훈장을 수상했다. 해병대는 이 전투를 한국전쟁 때 5대 작전에 이어 해병대 6대 작전의 하나로 전사에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1965년 10월 베트남에 상륙해 1972년 2월 귀국 때까지 6년 5개월간 캄란 · 투이호아 · 추라이 · 호이안지구 등지에서 여단급작전 55회, 대대급작전 106회, 소대급작전 14만 4173회 등을 전개해 북베트남군 사살 9669명, 포로 715명, 귀순 590명, 용의자 체포 2969명, 개인화기 노획 4055점, 공용화기 노획 293문 등의 전과를 올렸으며, ‘상승해병’의 전통을 세계에 과시했다.
신라시대 화랑도의 정신인 오계(五戒)와 세 가지 금기(禁忌)를 포함한 팔계(八戒)로 ① 국가에 충성하라, ② 부모에게 효도하라, ③ 벗에게 믿음으로 대하라, ④ 전투에서 후퇴하지 말라, ⑤ 뜻없이 죽이지 말라, ⑥ 욕심을 버리라, ⑦ 유흥을 삼가라, ⑧ 허식을 삼가라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팔각은 팔극(八極)을 뜻하며 지구 어디에서든지 전투해 승리하는 해병임을 상징하고, 팔각의 중심점은 지휘관을 중심으로 ① 평화와 독립을 수호, ② 엄정한 군기, ③ 희생적인 정신으로 국가에 헌신, ④ 가족적으로 단결, ⑤ 적에게는 용감, ⑥ 긍지와 전통을 세우며, ⑦ 불굴의 투지, ⑧ 필승의 신념으로 승리를 쟁취 등 여덟 가지 해병의 길을 가리키고 있다.
진홍색은 피와 정열, 그리고 약동하는 젊음을 조국에 바친 해병의 전통을 상징하며, 황색은 언제나 명랑 · 쾌활하고 평화를 수호한다는 신념을 상징하고 있다.
1949년 4월 15일 해병대 창설 당시 2개 소총 중대로 발족한 전투부대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래 전투 임무를 수행하면서 창설된 제1연대와 독립 제5대대 및 지원부대 등을 통합해 1952년 10월 1일 해병 제1전투단으로 창설되었다.
서부 전선과 수도 서울의 방위임무를 수행하면서 휴전을 맞이한 제1전투단은 한국전쟁 기간 동안 휴전선 이북에 있는 동해 · 서해의 주요 전략 도서를 확보해 사수하다가 철수한 부대를 보강, 통합해 1954년 2월 1일 해병 제1여단으로 증편했다. 이후 1955년 1월 15일 공포된 대통령령에 의해 그 해 3월 15일 국내 유일의 국가전략 기동부대인 상륙사단의 편성이 완료되었다.
1952년 3월부터 7년간 서부 전선의 휴전선과 수도권 방위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던 해병 제1상륙사단은 국가전략예비대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포항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1959년 2월 제1연대를 기간으로 제1임시여단이 창설되어 김포반도를 방어하게 되었다. 김포반도에서 서부 전선의 휴전선과 수도 서울을 방위하면서 5·16군사정변의 선봉군으로 참가하기도 했던 제1임시여단은 1966년 11월 새로이 창설된 제5여단에게 임무를 인계하고 이듬해 1월 사단으로 복귀했다.
한편, 포항으로 이동한 제1상륙사단은 전략기동부대로서의 출동 태세에 완벽을 기하기 위해 꾸준히 부대를 정비, 강화하면서 대대에서 연대, 연대에서 여단 및 사단규모로 상륙작전 능력을 발전시켜 항시 출전 태세를 유지했으며, 1965년 9월에는 제2연대를 기간으로 제2여단(청룡부대)을 창설되어 그 해 10월 한국군 전투부대의 선진으로 베트남에 파병되었다.
1965년 10월부터 6년 5개월간 베트남의 캄란 · 투이호아 · 추라이 · 호이안 등지를 평정하면서 산악전의 실전을 경험한 제2여단(청룡부대)은 1972년 3월 귀국과 동시에 제5여단으로부터 서부 전선의 휴전선과 수도 서울의 방위임무를 인수했으며 제5여단은 그날로 해체되었다.
이와 같이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380명의 소수 병력으로 출발해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치르는 동안, 1개 상륙사단을 비롯해 제2여단 · 도서경비부대 등의 전투부대와 교육기지사령부 · 상륙전기지사령부 · 지휘참모대학 · 보급정비단 · 직할경비대 등의 교육 및 지원부대로 순조롭게 부대를 증설, 창설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한 해병대는 24년 6개월간 ‘귀신잡는 해병’, ‘무적해병’, ‘신화를 남긴 해병’,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 등 수많은 무용담과 전통을 남겼다.
또한 1973년 10월 10일 국방 태세를 실질적으로 강화하기 위해 해병대를 개편하기로 결정한 국가시책에 따라 전투부대는 해군의 상륙전부대로 예속되었고, 사령부를 비롯한 교육 및 지원부대는 해체됨으로써 그간 상승의 전통을 이어 온 해병대는 해군에 통합되었다.
해군은 1986년 9월 국방부로부터 해병 지휘체제 개선에 관한 검토 지시를 받은 뒤, 1년여 만인 1987년 10월 29일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1987년 11월 1일 해군에 해병부대의 상륙 · 지상작전 · 교육훈련 및 군행정에 관한 사항들을 관장하는 중간사령부인 해병대사령부를 창설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1994년 4월 6일에는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 있던 해병대사령부를 화성군으로 이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