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정은 조선후기 이조판서,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1646년(인조 24)에 태어나 1715년(숙종 41)에 사망했다. 서얼 출신을 삼조에 소통하자는 건의를 올렸고 붕당의 폐단을 논하면서 남인을 서용하자고 하여 노론의 반발을 샀다. 남인의 영수 허적을 비판한 오도일을 변호하다가 삭직되었으며 1676년(숙종 2)의 응지소에서는 윤휴를 비난하고 김수항을 옹호하다가 삭출되기도 했다. 당쟁의 화를 가능한 한 줄이려고 힘쓴 정치가이고, 의리·명분론에 집착하지 않고 백성의 어려움과 정치적 폐단을 변통하려 한 행정가로 평가받는다.
9세에 이미 『시경』과 『서경』을 암송했고, 12세에 『주역』을 도해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러 신동으로 인정받았다. 남구만(南九萬) · 이경억(李慶億)의 문인이고, 박세채(朴世采)와 종유(從遊)하면서 학문을 닦았다.
17세에 감시(監試) 초시에 장원을 했고, 1666년(현종 7) 진사시에 장원했으며 동시에 생원시도 합격하였다.
1671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한림회천(翰林會薦)에 뽑혀 사관으로서 활동하다가 홍문록에 올라 홍문관원이 되었고, 응제시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아 호피(虎皮)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그 동안 남인의 영수 허적(許積)을 비판한 오도일(吳道一)을 변호하다가 삭직되기도 하였다. 또한 1676년(숙종 2)의 응지소에서는 윤휴(尹鑴)를 비난하고 김수항(金壽恒)을 옹호하다가 삭출되기도 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 이후 병조정랑 · 승정원동부승지에 이르렀으나, 양부모의 상을 당해 일단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1689년 기사환국까지 승정원승지 · 성균관대사성 · 홍문관부제학과 제학을 역임하였다.
1686년에는 조선인이 청나라의 국경을 넘어들어간 사건이 국제 문제로 비화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당시 호조참판으로서 부연(赴燕)하기도 하였다.
1685년에는 사학 유학생들이 이른바 『명재의서(明齋疑書)』가 이이(李珥)를 모함하여 욕했다고 비난하자 윤선거(尹宣擧)의 강도(江都) 사건이나 이이의 입산(入山)한 잘못은 똑같은 문제라고 지적하였다.
2년 후 노소분당이 심각해지자 윤선거를 옹호한 나양좌(羅良佐)의 견해를 지지함으로써 노론세력의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장희빈(張禧嬪)에 대한 총애 문제를 들추어낸 이세구(李世龜)를 옹호하고 청류(淸流)로 지칭되는 경명행수(經明行修)의 선비들을 힘써 선발하려고 노력하였다.
기사환국 이후에는 주로 외직에 있으면서 안동부사 · 연안부사를 역임하다가 부친상을 당해 물러났다.
1694년 갑술환국 이후 한성판윤 · 사헌부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장희재(張禧載)를 사형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홍문관대제학 · 이조판서에 임명된 뒤에는 서얼 출신을 삼조(三曹)에 소통하자는 건의를 올리기도 하였다.
1697년 우의정에 올랐고, 왕세자 책봉을 위한 주청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 때 붕당의 폐단을 논하면서 남인들의 일부 서용을 주장하는 입장을 개진, 노론세력의 강한 반발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단종 복위를 성사시키기도 하였다.
1699년 좌의정을 거쳐 1701년 영의정이 되었다. 이 때 김장생(金長生)의 문묘배향 논의가 일어나자 가볍게 처리할 수 없는 문제라고 반대하였다.
이 해 8월에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죽고 장희빈에 의한 무고(巫蠱)의 변이 일어나자 왕세자 보호를 위해서는 생모인 장희빈을 사사(賜死)해서는 안 된다고 극력 반대하였다.
또한 붕당 문제보다 도학(道學)이 쇠퇴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 이유로 파직, 유배의 명령이 내려졌다가 다음 해 석방되어 진천에 거주하였다.
이듬해 다시 영의정이 되었는데 1710년까지 모두 열 차례 입상(入相)하였다. 이후 노론세력이 대보단(大報壇)을 세우면서 의리론으로 할아버지 최명길을 공격하자 이를 변호하였다.
또 임보(林溥) · 이잠(李潛)의 옥사에서는 왕세자의 처지에 문제되지 않도록 안옥(按獄)하여 노론의 비난을 샀으며, 여기에 민암(閔黯)의 아들까지 사형에 처한 것은 비법적 처사라고 비난했던 사실까지 들추어지고, 그의 저서 『예기유편(禮記類篇)』가 주자의 주와 다르다며 비판받는 등 노론의 집중 공격을 받자 1711년 이후 미사(渼沙)에 은퇴하였다.
1715년 기사(耆社: 기로소의 다른 이름)에 들어갔고, 이 해 사망하였다. 청주 대율리(大栗里)에 장례지냈으며, 뒤에 숙종묘에 배향되었다.
성격이 겉으로는 화평하나 안으로는 굳건했으며 염려나 불만의 기색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직업 관료의 성격이 강해 의리 · 명분론에 집착하지 않고 백성의 어려움과 정치적 폐단을 변통하려 했던 행정가였다. 또한 당쟁의 화를 가능한 한 줄이려고 힘썼던 정치가이기도 하였다.
『야승(野乘)』을 집대성하려고 노력하여 찬수청을 설치하게 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편저에 『전록통고(典錄通考)』가 있고, 저서로 『예기유편』과 『명곡집(明谷集)』 36권이 현재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