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수옹(壽翁), 호는 양와(養窩). 이항복(李恒福)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성주목사 이시현(李時顯)이다. 박장원(朴長遠)의 문인이다.
1673년(현종 14)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5년(숙종 11)에 음보(蔭補)로 경양도찰방(景陽道察訪)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다. 그 뒤 1695년 다시 추천을 받아 예산현감에 임명되고, 1697년 장령을 거쳐 서연관(書筵官)·상의원첨정(尙衣院僉正)·홍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경학(經學)·예설(禮說)·역사 등에 걸쳐 박통하였다. 『대학』의 물격설(物格說)에 대하여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해석이 모두 정주(程朱)와 다르다고 반박하고, 정심장(正心章)에 대해서도 이황의 해석에 비판을 가하였다. 기해예설에 관해서는 비교적 객관적인 견해를 보였다.
여러 학설을 집대성하여 『가례』를 독자적으로 주석하였다. 역사에도 밝아 한사군과 삼한의 위치를 논증하는 글을 남겼다. 박세채(朴世采)·윤증(尹拯)·남구만(南九萬)·최석정(崔錫鼎) 등 소론에 속하였던 학자들과 학문적 교류가 있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홍주의 혜학서원(惠學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양와집(養窩集)』 13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