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길보(吉甫), 호는 미촌(美村)·노서(魯西)·산천재(山泉齋). 아버지는 대사간 윤황(尹煌)이며, 어머니는 창녕성씨(昌寧成氏)로 성혼(成渾)의 딸이다. 윤문거(尹文擧)의 아우이며, 윤증(尹拯)의 아버지이다. 김집(金集)의 문인이다.
1633년(인조 11) 식년문과에 형 윤문거와 함께 급제하였다. 1636년 청나라의 사신이 입국하자 성균관의 유생들을 규합, 사신의 목을 베어 대의를 밝힐 것을 주청하였다. 그 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피신하였다.
이듬 해 강화도가 함락되자 처 이씨가 자결하였으나 평민의 복장으로 탈출하였다. 1651년(효종 2) 이래 사헌부지평·장령 등이 제수되었으나, 강화도에서 대의를 지켜 죽지 못한 것을 자책하고 끝내 취임하지 않았다. 김집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성리학과 예학(禮學)에 잠심하였다.
송시열(宋時烈)이 경전주해(經傳註解) 문제로 윤휴(尹鑴)와 사이가 나빠지자, 평소 윤휴와 친교가 깊었고 윤휴의 재질을 아끼는 마음에서 변호하는 태도를 취하다가, 교분이 두터웠던 송시열로부터 배척을 당하게 되었다. 이것이 뒤에 노소분파의 한 계기가 되었다.
유계(兪綮)와 함께 저술한 『가례원류(家禮源流)』·『후천도설(後天圖說)』 및 이에 관하여 유계와 논변한 편지를 비롯한 많은 저술을 남겼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영춘(永春)의 송파서원(松坡書院), 영광(靈光)의 용암사(龍巖祠), 노성(魯城)의 노강서원(魯岡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노서유고(魯西遺稿)』 26권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