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혁신정강 ()

근대사
사건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당시 김옥균 등 개화당이 독립과 개혁을 목표로 공포한 14개조 개혁안.
사건/사회운동
발생 시기
1884년 12월 6일
관련 단체
개화당
관련 인물
김옥균|박영효|서재필|홍영식|서광범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갑신혁신정강(甲申革新政綱)은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당시 김옥균 등 개화당이 독립과 개혁을 목표로 공포한 14개조 개혁안이다. 대내적으로는 정치권력의 장악, 정치체제의 정비, 경제적 · 군사적 기반 조성에 중점을 두었다.

정의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당시 김옥균 등 개화당이 독립과 개혁을 목표로 공포한 14개조 개혁안.
발단

1884년 12월 4일 김옥균(金玉均)을 비롯한 개화당은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다. 김옥균 주도하에 신정부 각료들은 협의를 통해 개혁안을 마련하고, 1884년 12월 6일 아침에 이를 국왕 전교(傳敎)의 형식을 빌어 공포하였다.

경과 및 결과

공포된 정령(政令)의 항목은 상당히 많아 80여 개 조항에 달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김옥균의 『 갑신일록(甲申日錄)』에 전해지는 14개 조항은 다음과 같다.

① 대원군을 가까운 시일 내에 모셔 올 것(조공하는 허례는 의논하여 폐지함).

②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權)를 제정하고, 사람으로써 관(官)을 택하게 하지, 관으로써 사람을 택하지 말 것.

③ 전국적으로 지조법(地租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의 곤란을 구제하며 더불어 국가 재정(國用)을 넉넉하게 할 것.

④ 내시부(內侍府)를 혁파하고, 그 가운데 우수한 재능 있는 자는 등용할 것.

⑤ 그동안 간탐(奸貪)하여 나라를 병들게 함(病國)이 심한 자는 정죄(定罪)할 것.

⑥ 각 도의 환상(還上)은 영구히 와환(臥還)할 것.

⑦ 규장각(奎章閣)을 혁파할 것.

⑧ 시급히 순사제도(巡査制度)를 두어 절도를 방지할 것.

⑨ 혜상공국(惠商公局)을 혁파할 것.

⑩ 전후에 유배(流配), 금고(禁錮)된 사람들은 작량(酌量)하여 석방할 것.

⑪ 4영(四營)을 합하여 1영(一營)을 만들고, 영 중에서 장정을 뽑아 시급히 근위(近衛隊)를 설치할 것.

⑫ 국내 재정은 모두 호조(戶曹)가 관할하게 하고, 그 밖의 일체의 재무 관청은 혁파할 것.

⑬ 대신과 참찬은 매일 합문(閤門) 안 의정소(議政所)에서 회의하여 정사를 결정한 뒤에 왕에게 아뢴 다음(稟政), 정령(政令)을 반포 시행할 것.

⑭ 정부 육조 외에 무릇 불필요한 관청에 속하는 것은 모두 혁파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토의(酌議)하여 아뢰도록(啓) 할 것.

이처럼 위 14개조 정령은 대내적으로는 정치권력의 장악, 정치체제의 정비, 경제적 · 군사적 기반 조성에 중점을 두었다. 이 개혁안은 곧바로 시행할 것을 전제로 하였다. 명분과 상징성이 강한 조항을 앞쪽에 배치하여 정변의 정당성을 강조하였고, 그동안 개혁 과제로 제기되었던 탐관오리의 수탈 금지 등 구체적 개혁안이 제시되었다.

정변 주도 세력은 심혈을 기울였던 군사 · 재정 · 정치 분야의 핵심적 개혁 과제를 뒷부분에 배치하여 자신들의 의도가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것을 경계하였다.

정령 제1조의 조공허례 폐지는 임오군란 후 조공 체제를 빙자하여 조선에 대한 속방화정책(屬邦化政策)을 펼치던 청의 의도를 타파하려 한 것으로,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한다. 이로써 조선이 완전한 자주국을 수립하고 서양 제국과 동렬에 서는 근대적 국가 수립을 꾀하였다. 한편 민중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던 대원군을 전면에 내세워 지지를 얻어내려 하였다.

2조의 인민평등권 제정은 대체로 양반, 문벌의 타파를 통한 신분제도 개혁에 초점을 둔 혁신적 조항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런데 김옥균 등 개화당은 구체적으로는 존망의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하려는 차원에서 당시 권력을 장악했던 민씨 척족과 4영사, 유력 가문의 문벌 등의 제거에 중점을 두었고 신분제 폐지를 전면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다.

현실적으로 신분의 의미가 퇴색되고 노비가 사라져가는 추세 속에서 개화파는 서구 민주주의와 인민평등권, 천부인권설에 깊은 관심을 갖고 조선도 시행해야 할 개혁 방향으로 설정하였다.

다만, 당장 인민에 참정권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본 반면, 통치 대상으로서 병역 의무, 과세 의무, 교육 기회, 법 적용에 대한 평등 장치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또 기존의 인재 등용 방식인 관직으로써 사람을 선택하는 것을 지양하고, 문벌 타파와 인민평등권을 전제로 일단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그중에서 능력 있는 사람을 선택, 임명할 것을 주장하였다. 재능 있는 환관의 등용을 구체화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정변 주도 세력은 의정부 중심의 정치체제와 권력 운영을 구상하였다. 13조에서 정부 조직을 의정부, 육조로 일원화하려 하였고, 의정부, 육조가 국가권력 행사의 중심이 되도록 규정하였다. 여기서 의정부는 육조를 총괄할 뿐 아니라 국가 중대사를 협의‧결정하는 최고의 국가권력기구로 설정되었다.

육조는 관련 분야의 중복된 기구들을 통폐합하여 일원화하고, 근대적 운영 방식을 도입하고자 하였다. 14조를 통해 실제 정책 결정권은 대신과 참찬이 주도하는 권력 운영 방식을 꾀하였다. 의정소에서 의결된 사안은 국왕의 재가를 얻어 정령으로 공포, 시행하도록 하였다.

한편 개화당은 왕권을 제한하고 왕실의 권위를 약화시키기 위하여 내시부 혁파(4조), 규장각 혁파(7조)를 제시하였다. 아울러 간탐(奸貪)하여 나라를 병들게 함(病國)이 심한 자의 정죄(5조)를 통해 국가권력 운영의 중심 세력인 민씨 척족과 그 일파의 처단 의도를 나타냈다. 또 유배, 금고된 사람의 작량‧석방을 주장(10조)함으로써 대원군 세력의 협조와 지지를 획득하여 정치 기반을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군사, 경찰제도 개혁 구상과 관련하여, 11조에서 종래 군대 간 대립과 갈등을 보였던 청국식 친군 4영을 1영으로 통합할 것을 주장해 일원화된 군사제도 확립을 꾀하였다. 한편 근위대를 급히 설치하려 한 것은 비상시국에서 국왕을 확보하여 권력 행사의 대의명분을 세워야 했던 의도를 보여 준다.

또한 8조에서 표면상 절도 방지를 위해 순사 설치를 주장하였는데, 실상 정변에 반대하는 정치적 반대파나 민중의 동요에 대비하기 위한 치안권 장악을 주요 목적으로 하였다.

갑신정변 주도 세력은 부국강병을 추진하기 위한 국가 재정 확보에 중점을 두었고, 김옥균이 호조참판을 맡아 재정을 직접 관장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재정 기구를 통합하고 조세 제도를 개혁하고자 하였고, 중간 수탈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12조에서 호조 중심의 국가 재정 통합과 일원화를 구상하였다. 국내 재정을 모두 호조가 관할한다는 것은 지속된 각 사 · 각 아문의 독자적 재정운영권을 폐지하되, 해관세를 제외한 국내재정을 모두 관할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한편 3조에서 지조법을 개혁하여 이서의 농간을 막는다고 제시하였는데, 이는 토지세 부과 운영상 문제를 바로잡고 세목 축소, 중간 수탈 방지. 상납 과정상 폐단 제거를 통해 민생과 국가 재정을 해결하려는 방안이었다.

한편 6조는 그동안 환곡 제도 자체를 폐지하려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으나, ‘혁파’가 아닌 ‘와환(臥還)’하겠다고 한 것으로, 당시 환곡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한 방안으로 제시되었던 방식 즉 ‘빌려간 곡식(元穀)은 받지 않고 이자와 손실분(耗穀)만 받겠다’라는 의도를 담고 있었던 것에 가깝다.

즉 개화당은 백성 진휼과 재생산 보장을 위한 원래의 환곡 기능은 폐지하되, 부가세 같은 모곡의 부세 기능은 유지하여 국가 재정을 충당하는 세원으로 삼고자 하였다. 또 9조에서는 보부상 총괄 기구였던 혜상공국 혁파를 주장하였다. 개화당은 권력 실세인 민씨 척족 일파의 정치, 경제적 기반이 되었던 혜상공국을 혁파하고, 근대적 상회사 체제를 통해 대외 무역에 진출하여 부국강병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의의 및 평가

갑신정변 주도 세력의 개혁안을 담은 14개조의 정령은 정치체제와 국가권력 운영 방안, 정치권력 장악과 반대파 숙청 등 정치적 내용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독립이라는 대외적 과제보다는 대내적 정치권력 장악, 정치체제 정비, 국가재정 확보에 중점이 있었다.

한편 정령에는 정변에 가담한 참여층의 요구가 군제 개혁, 내시부 혁파 주장 등에 직간접적으로 반영되어 제한적이지만 아래로부터의 요구가 반영되어 있었다.

또한 정령에 나타난 개혁 구상은 근대적 제도를 조선의 현실에 맞게 재구성하여 수용한 결과였다. 그러나 기존 지배 질서를 파괴, 전복하기보다는 지배 계층의 기득권을 온존시키는 범주 내에 이루어졌으며, 지배 체제 내에서의 근대화를 지향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갑신일록(甲申日錄)』

단행본

김종학,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일조각, 2017)
한국사연구회 편,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하』(지식산업사, 2008)
박은숙, 『갑신정변 연구』(역사비평사, 2005)
김용구,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사대질서의 변형과 한국 외교사』(원, 2004)
이광린, 『개화당연구(開化黨硏究)』(일조각, 1973)

논문

조재곤, 「총론: 1884년 정변의 정령(政令)에 대하여」(『역사와현실』 30, 한국역사연구회,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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