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속도 화첩』은 정조 대 풍속화 유행을 이끌었던 화가인 김홍도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서민들이 생업에 종사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풍속화가 어느 때보다 유행하였다. 김홍도의 『풍속도 화첩』은 특히 정조 대에 유행한 풍속화의 한 경향을 잘 반영하고 있으나, 정확한 제작 동기와 1918년 이전의 전승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전하지 않는다. 1918년 11월 조선총독부박물관은 조한준(趙漢俊)이라는 인물에게서 75원(円)에 『풍속도 화첩』을 구입하였으며, 이 화첩은 현재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957년에는 『풍속도 화첩』의 수미(首尾)에 포함된 2점의 「군선도(群仙圖)」를 분리하여 족자로 만들었으며, 25점의 풍속도만으로 새롭게 장황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김홍도의 『풍속도 화첩』은 종이 바탕에 수묵과 옅은 채색으로 그려졌다. 각 폭의 크기는 대부분 세로 27㎝, 가로 22.7㎝ 내외이다. 마지막 폭인 「장터길」만 세로 27.3㎝, 가로 50.2㎝이다. 25폭은 하나의 화첩으로 구성되었으며, 폭마다 다른 내용의 풍속 장면이 그려져 있다. 각 폭은 가장자리에 먹선으로 그린 테두리가 그려졌다. 화가의 관서를 비롯하여 어떤 제발(題跋)도 기록되지 않았다. 다만 25폭 중 13폭에 '김홍도인(金弘道印)'이라는 백문방인(白紋方印)이 찍혀 있어 김홍도의 그림임을 알 수 있을 뿐이다.
『풍속도 화첩』의 25폭 중 가장 뛰어난 장면으로 「서당」과 「씨름」 장면 등을 들 수 있다. 「서당」 장면에는 훈장과 학생이 둥글게 원을 그리며 앉아 있다. 화면의 한편에서 눈물을 흘리는 소년, 이를 보고 웃는 학동들, 난처한 표정의 훈장 등 수업 중에서 벌어진 작은 사건이 익살스럽게 묘사되었다. 「씨름」은 구경꾼들이 원형을 그리며 둘러앉았고, 그 중심에는 두 사람의 씨름꾼이 서로 맞붙어 힘을 겨루고 있다. 안간힘을 쓰는 씨름꾼과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는 군중의 표정이 생생하게 묘사되었다.
『풍속도 화첩』의 25점 간에는 필법의 정교함과 숙련도 등에서 편차가 관찰된다. 이 때문에 『풍속도 화첩』을 제작한 화가에 관한 다양한 해석이 제기된 바 있다. 화폭 간에 나타나는 차이를 바탕으로, 첫째로 김홍도가 단시간에 대량의 그림을 그린 결과라는 해석이 있으며, 둘째로는 「씨름」, 「무동」 등 뛰어난 솜씨를 보이는 작품은 김홍도의 진작이지만, 상대적으로 수준이 떨어지는 작품은 모작이나 위작일 것이라는 추정이 있다. 마지막으로, 이 화첩 전체가 후대의 모본으로서 화보를 제작하기 위한 일종의 밑그림이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 바 있다.
김홍도의 풍속화는 윤두서와 조영석 등이 개척한 조선적인 정취가 풍부한 사실적인 풍속화를 계승한 것이다. 아울러 서민의 삶을 대상으로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풍속화의 회화성을 한 단계 높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서당, 장터, 대장간 등 일상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인간 군상이 살아가는 다양한 모습을 묘사한 『풍속도 화첩』은 김홍도 풍속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김득신(金得臣), 유숙(劉淑) 등 후대 화가들의 그림에서 『풍속도 화첩』과 유사한 도상을 그린 그림이 등장하고 있어 그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개항기의 화가들도 김홍도의 화첩을 모사한 그림을 남겼다. 미국 스미소니언박물관에는 1885년에 입수된, 한진우(韓鎭宇)가 『풍속도 화첩』의 일부를 모사한 화첩이 소장되어 있으며, 영국박물관에는 문혜산(文惠山)이 모사한 풍속화첩이 소장되어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당시 조선을 찾은 서양인들이 조선인의 생활 풍속을 담은 풍속화를 선호하였던 상황을 전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