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자는 여경(餘慶), 호는 남창(南窓)이다. 고조할아버지는 김일손(金馹孫)이고, 아버지는 김언겸(金彦謙), 어머니는 광주 이씨(廣州李氏) 이중경(李重卿)의 딸이다. 부인은 이달충(李達忠)의 딸이다.
1564년 식년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고, 1573년 봉상시 주부, 1601년 양주목사, 1606년 여주목사, 1617년 동지돈녕부사 차사자관(次寫字官) 등을 역임하였다. 김현성은 국가의 여러 사업에서 글씨를 담당하였다. 1601년 국상에서 만장서사(挽章書寫)로 활약하여 포상을 받은 기록이 있으며, 1601년과 1606년에는 중국 사신을 맞이하여 제술관(製述官)으로 활약하였다. 동지돈녕부사 시절에는 왕명으로 평양에 파견되어 차사자관 자격으로 기자비(箕子卑)의 비문을 모사하였다.
김현성은 한호(韓濩)와 이름을 나란히 하였던 서예가이다. 현재 남아 있는 작품 대다수는 송설체(松雪體)를 기반으로 하는 행서이다. 그의 행서는 조맹부(趙孟頫)의 송설체를 근간으로 하되, 부분적으로 왕희지(王羲之)의 영향을 수용하였다. 김현성은 조선 전기 안평대군의 송설체를 계승하여 조선 후기로 이어주는 교량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된다.
총 138수의 시문이 수록된 『남창잡고(南窓雜稿)』라는 문집을 남겼다. 『남창잡고』는 제자였던 오숙(吳䎘)에 의해 1634년 편집 · 간행되었다. 이 책은 김현성의 친필 시고를 그대로 목판에 새겨 발간한 것으로서, 김현성 글씨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그 외 주요 작품으로 「숭인전비문(崇仁殿碑文)」, 「이충무공수군대첩비문(李忠武公水軍大捷碑文)」, 「조헌순의비문(趙憲殉義碑文)」, 「신숭겸충렬비문(申崇謙忠烈碑文)」, 「정언유격묘비문(正言柳格墓碑文)」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