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포(戰袍)라는 어휘는 『고려도경(高麗圖經)』 장위조(仗衞條)의 영군낭장기병(領軍郎將騎兵)에 보이는데 이 책에서는“영군낭장기병 중 고려인은 자라(紫羅) 전포에 흰 바지[白袴]와 검은색 신발[皂屨], 주패(珠貝)로 장식한 문라건(文羅巾)을 착용하고 거란의 강졸(降卒)은 청록긴사대화전포(靑綠緊絲大花戰袍)에 자색이나 황색이나 조색(皁色) 바지를 입고 곤발(髡髮)에, 정수리에 딱 맞는 건을 썼다."라고 기록하였다. 고려 기병은 자라 전포, 거란 항졸은 청록 긴사(緊紗)로 만든 대화 전포를 착용하였다는 것인데 모든 군사가 전포를 입지는 않은 것을 보면 특정한 형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형태를 알기는 어렵다.
중국측 기록 중 『금사(金史)』 「의위지(儀衛志) 하(下)」에는 “장행(長行) 120인이 철립(鐵笠), 홍금단화전포(紅錦團花戰袍), 철갑(鐵甲), 궁시(弓矢), 골타(骨朶)를 갖추었다.”라는 부분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전포라는 개념은 공통적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갑옷 없이 착용하기도 하였으나 금나라의 경우처럼 갑옷의 받침옷으로도 착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고려사(高麗史)』 지(志) 군례(軍禮) 견장출정의(遣將出征儀)에 원수(元帥)는 융복(戎服)을 착용한다고 하는데 이 융복을 전포라고 일컬은 것인지도 모른다. 고려시대의 전포 형태를 알 수는 없으나 이는 전장에서 입을 수 있는 옷, 갑옷 받침옷으로 입을 수 있는 옷을 의미할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전포’를 검색해 보면 대체로 융복 철릭을 뜻하거나 군복을 뜻함을 알 수 있다. 『광해군일기』에 “군관의 복색은 입식(笠飾)과 전포에 지나지 않으니 … ”라는 글이 보인다. 이때의 전포라 함은 융복 철릭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영조실록』에는 “ 인조가 포위 당한 속에서 입었던 망룡전포(蟒龍戰袍)를 바쳤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속잡록(續雜錄)』에 따르면 인조가 포위당한 속에서 입은 전포라는 것은 남단융의(藍緞戎衣), 즉 남단 철릭이었다. 『현종개수실록』 1664년(현종 5)의 기록에는 “금군(禁軍)과 무사들의 전포도 반드시 비단으로 하지 않아도 되니 지금부터라도 절검하는 것이 마땅하다.”라는 문장이 보인다. 17세기 당시 금군은 흑립과 철릭에 동개 · 궁시를 갖춘 모습으로 확인되므로 이상의 기록에 보이는 전포는 철릭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숙종실록』 1698년(숙종 24) 기록에는 “묘년(妙年)의 남자가 융립(戎笠)을 쓰고 전포를 입고서 수종(隨從)하였다.”라는 부분이 보이고 1712년(숙종 38) 기록에는 “전립(戰笠)을 쓰고 전포를 입은 중이 흥원문(興元門)으로 해서 함부로 들어왔다.”라는 문장이 보인다. 이 기록에서 전포란 전복(戰服)과 협수(挾袖) 등의 군사복 차림을 의미할 수 있다. 따라서 전포란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개념으로, 특정한 형태의 옷을 지칭하기보다는 군사들이 착용한 군융복 개념의 긴 웃옷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