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두리(蒙頭里)는 왕실의 기행나인(騎行內人)과 왕실 잔치에서 정재(呈才)에 참여한 여령(女伶) 등이 입는, 길이가 긴 포 형태의 겉옷이다. 문헌에는 ‘몽두의(蒙頭衣)’ ‘몽두리(蒙頭里)’, ‘몽도리(蒙道里)’, ‘몽도리’로 기록되며 착장자의 역할에 따라 ‘장삼(長衫)’, ‘황초삼(黃綃衫)’, ‘금향협수(金香挾袖)’ 등의 이칭으로 쓰인 기록도 있다. 조선 전기에는 신분이 낮은 여성들이 이 옷을 예복으로 입기도 하였으나 시대가 바뀌면서 착장자의 신분에 따라 용도와 형태가 변하였다.
몽두리(蒙頭里)는 조선 전기에 신분이 낮은 여성들이 예복으로 입기도 하였으나 시대가 변하면서 왕실의 큰 행사에 말을 타고 가는 기행나인(騎行內人)이나 왕실 잔치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정재(呈才)에 참여한 여령(女伶) 등이 입는 길이가 긴 포 형태의 겉옷을 뜻한다. 문헌에는 ‘몽두의(蒙頭衣)’ ‘몽두리(蒙頭里)’, ‘몽도리(蒙道里)’, ‘몽도리’로 기록되며 착장자의 역할에 따라 ‘장삼(長衫)’ ‘황초삼(黃綃衫)’ ‘금향협수(金香挾袖)’ 등 이칭으로 쓰인 기록도 있다.
몽두리는 동일한 문헌에 두 가지 명칭으로 기록되기도 하고, 착장자의 신분에 따라 용도 또는 형태가 변화되는 등 다양한 현상을 보이는 복식이다.
조선 전기의 몽두리는 1446년(세종 28)에 상복(喪服)으로 쓰인 배자(背子)를 우리나라의 몽두의(蒙頭衣)라 말한 것에서 길이가 긴 포 형태로 추정하고 있다. 1412년(태종 12) 6월에는 서인(庶人)의 부녀와 종비 · 천례의 옷은 주(紬)와 저포(苧布)로 만든 몽두의를 입도록 한 것에서 신분이 낮은 여성들이 예복으로 입었던 것이 확인된다.
조선 후기의 몽두리는 기행나인이나 여령이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기행나인이 착장한 몽두리는 소매가 넓고 길이가 긴 형태의 홍색포와 황색포의 형태이며 장삼(長衫)에서 몽도리로 명칭의 변화를 보였다. 숙종 이후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의 반차도(班次圖)에 머리에 립(笠)을 쓰고 이 옷을 입은 모습이 묘사되어 있으며 동일한 기록에서 이 옷을 ‘홍장삼(紅長衫)’, ‘황장삼(黃長衫)’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미가례시일기』(1848)에는 기행나인의 겉옷으로 ‘홍몽도리 1쌍, ‘황몽도리 1쌍’을 마련한 기록이 있으며, 같은 행사를 기록한 『경빈가례등록(慶嬪嘉禮謄錄)』(1847)의 반차도에는 소매가 넓고 길이가 긴 형태의 포를 입은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를 통해 기행나인이 착장한, 소매가 넓고 길이가 긴 형태의 겉옷이 처음에는 장삼으로 불리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몽도리로 불린 것으로 추정된다.
여령이 입은 몽두리는 반 소매를 한 황색 긴 포인데, 기행나인의 몽두리와는 다른 형태이며 동일한 옷을 몽두리와 황초삼으로 기록하고 있다. 역대 『진찬 · 진연 의궤』류에는 여령들이 황색 포를 입고, 이를 ‘황초삼(黃綃衫)’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같은 책의 ‘악기풍물’ 조에는 이를 ‘몽도리(蒙道里)’라 기록하였다. 형태는 길이가 길고 앞길이 합임(合袵)이며 옆선이 트여 있고 어깨 부분에 색동 장식이 있다. 여령이 입은, 대표적인 몽두리는 독일 라이프치히그라시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대한제국 시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몽두리를 금향협수라 칭한 것도 있다. 무신년 『진찬의궤(進饌儀軌)』(1848)에는 검기무 여령이 입은 군복 일습에서 동다리 옷을 ‘복식도’에는 금향협수라 표기하였으며, 동일한 문헌의 ‘악기풍물’ 조에는 금향협수를 몽도리로 표기하였다. 황초삼과 동다리라는, 형태가 전혀 다른 두 가지 옷을 몽두리라는 동일 명칭으로 표기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이외에도 조선 말기 이후 무녀(巫女)가 입은 황색 포를 몽두리라 불렀는데, 여령의 몽두리와 비교했을 때 세부적인 형태는 달라도 소매가 좁고 앞길이 맞닿는 대금형(對襟形) 황색 포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조선 말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의 무녀용 몽두리 유물이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