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복식에서 배자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국시대로, 고구려 삼실총 벽화에서 배자로 추정되는 옷을 입은 남자상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통일신라 흥덕왕복식금령(興德王服飾禁令)에 기록된 배당(褙襠)과 반비(半臂)도 배자에 속한다. 고려시대의 배자에 대해서 『고려사(高麗史)』에서 군복(軍服)으로 사용된 예를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일상용 배자와 예복용 배자가 있었다. 예복용 배자는 조선 후기에 국속(國俗)화된 적의(翟衣) 제도가 정착되기 전까지 왕비나 세자빈의 대례복에 포함되었다. 또한 여성들의 상례복(喪禮服)으로 사용되어 태종 8년 5월 시녀의 상복으로 등장한다. 이후에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상례에 사용된 배자에 대한 내용이 수차례 나타난다.
남성들의 반비, 반비의(半臂衣), 답호(褡護), 쾌자(快子), 호의(號衣), 더그레 등도 넓은 의미의 배자에 속하는 옷이었다. 하지만 소매가 짧거나 없는 저고리 길이의 웃옷인 일상용 배자는 조선 후기의 유물에 많이 나타난다.
왕비와 왕세자빈의 가례(嘉禮)에 입은 예복용 배자는 긴 소매에 옷길이도 긴 예복이었다. 또한 『사례편람(四禮便覽)』에서 배자에 대하여 “ 『국조오례의』에 본국(本國)의 몽두리(蒙頭里)라 한다.”라고 하여 소매가 없거나 짧되, 길이는 긴 맞깃 형태의 옷으로 설명하고 있다. 한편 서유구(徐有矩. 1764~1845)가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에서 우리나라 배자 형태에 대한 설명은 조선조 말의 배자 유물의 형태와 일치한다. 일반적으로 남자의 배자는 앞이 뒤보다 약간 짧고 옆선이 완전히 트여 있어, 앞길의 양 겨드랑이 밑에 달린 끈을 뒷길의 겨드랑이 밑 고리에 걸어서 입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출토된 조선 후기 배자의 형태는 이보다 다양하다. X자로 앞에서 여미는 등거리형이나 반소매형의 남자 배자 등도 있다. 여자용 배자는 출토 유물 중 옆선에 넓적한 끈을 봉제한 모양 같은 것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옆선이 봉제된 것이다. 조선 후기 여자의 저고리는 길이가 짧았기 때문에 굳이 옆선에 끈을 다는 것이 더 번거로웠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배자는 명주나 비단으로 겉을 하고, 안감으로 동물의 털이나 융을 댄 것이 있다. 모피를 대지 않고 솜을 두거나 누빔을 하여 등을 따뜻하게 하는 효과를 준 것도 있지만, 사(紗)와 같이 얇은 천을 사용해, 방한이 아닌 멋을 위해 착용한 것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