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관련 정보
도포
도포
의생활
물품
바지 · 저고리 위에 입는 겉옷.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바지 · 저고리 위에 입는 겉옷.
내용

국제(國制)와 중국제의 두 가지가 있다. 국제인 우리 고유의 포는 북방 호복 계통에 속하며, 그 구성은 장유(長襦 : 긴 저고리)가 길어진 것이다. 우리 나라 고대사회의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확인되는 포의 형태를 살펴보면, 개마총(鎧馬塚)에는 귀인인 듯한 인물이 자색 대수포(大袖袍)를 착용하고 있다.

각저총(角抵塚)·무용총(舞踊塚)에는 주비(厨婢)·시인(侍人)들까지도 착수(窄袖)의 포를 착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포의 모습은 백제·신라와 더불어 삼국이 비슷하여, 직령(直領)·교임(交袵)·직수형(直垂型)의 것이었다. 깃·도련·수구에는 선(襈 : 옷의 가장자리를 두른 색동)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것은 상하·귀천에 관계없이 남녀 모두가 착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원래의 포는 주비·시인이 착용하고 있는 포와 같은 착수의 것으로 오늘날 양복의 외투와 비슷한 것이었다. 귀인계급의 대수포는 중국의 육조풍(六朝風)과 상통하는 것이 있어, 이때에 와서는 포가 차차 의례적인 것으로 되어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인 648년(진덕여왕 2)에 김춘추(金春秋)가 당 태종에게 청병하러 가서, 장복(章服)의 개혁을 청하여 의대를 받아가지고 돌아와 관복을 개정하였다. 이것은 중국식 단령포로서 이후 조선 말기까지 관복이라 하면 이 단령포를 일컫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 포제를 논할 때에는 단령이 아닌 직령으로 이루어진 포의 변천을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고려시대 포제는 ≪고려도경 高麗圖經≫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에 의하면 국왕도 평거(平居) 연식시(燕息時)에는 조건(皁巾)에 백저포(白紵袍)를 착용하여 일반 서민과 다름이 없었으며, 그 제도는 남녀의 포가 비슷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고려도경≫에는 백저포와 백저의의 구별이 있었다고 되어있다.

백저포는 관수였고 백저의는 지체가 낮은 사람이 입는 착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백저포는 직령·교임·중거형(重裾型)이며, 고대사회에 있어서와 같이 띠를 매게 되어 있었다. 띠 대신 고름을 달게 된 것은 조선 중기 이후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유교를 국교로 삼음으로써 동방예의지국의 면목을 그대로 의관에 나타내었다.

외출 시에는 물론 연거시에도 관모를 쓰고 포를 입는 것이 이른바 사대부로서의 몸가짐이었다. 당시에는 신분제도가 엄격하여 상민에게 있어서는 포 착용이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부녀자는 내외법에 묶여 외출이 부자유스러웠으므로, 포의 착용은 사인의 전용물이 되다시피 하였다.

초기에는 중국에서 전래된 반비(半臂 : 깃과 소매가 없거나 아주 짧은 옷) 계통의 답호와 심의(深衣)에서 연유되었다고 하는 상의하상식(上衣下裳式)의 철릭을 편복 포로 착용하기도 하였다. 초기를 지나서는 고려시대의 백저포가 원나라 복속기에 그들 질손의 영향을 받고 또한 명제 직령과 습합하면서 직령포로 바뀌게 된다.

이것은 처음에는 관수(寬袖)였는데 차츰 광수로 변해갔다. 임진왜란 이후로는 도포가 생겨났는데 이것은 광수이며, 옷자락이 4폭이고, 뒤에 전삼이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후기에는 창의(氅衣)라는 것이 생겨났다. 여기에는 소창의, 즉 창옷 및 대창의와 중치막이 있었다.

소창의는 착수에 길이가 그다지 길지 않고 무가 없이 양옆이 트여 아랫부분이 3폭으로 갈라진 것이었다. 중치막은 소창의와 같되 광수에 길이가 조금 긴 것이다. 대창의는 관수에 길이도 길고 뒷솔기의 아랫부분이 갈라져 4폭으로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소창의는 연거복 또는 중치막·대창의의 밑옷으로, 대창의와 중치막은 외출복으로 착용하였다.

한말에 와서는 1895년(고종 32) 3월 을미개혁으로 공사예복에 두루마기만을 착용하게 하여 우리 포제가 두루마기 일색이 되었다. 두루마기는 소창의에 무를 가하고 양쪽 겨드랑이를 막은 것으로 원래는 편복 포였고, 도포의 밑옷이었다. 상민계급에서는 이를 소창의와 같이 웃옷으로 착용하였던 것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우리 나라 포는 처음에는 방한용으로 생겨났던 것인데, 고려를 거쳐 조선에 들어와서는 남자의 경우 아주 의례적인 것이 되어, 외국에서의 외투와는 달리 사계절을 통하여 착용하였던 것이 특징이다.

참고문헌

『증보한국복식사연구』(김동욱, 아세아문화사, 1979)
『한국복식사연구』(류희경,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80)
관련 미디어 (4)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