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편람(四禮便覽)』은 조선 후기 낙론(洛論) 학자인 이재(李縡)가 관혼상제의 실천에 활용하기 위해 『가례(家禮)』를 수정하고 보완하여 편찬한 행례서(行禮書)이다. 체계적인 구성과 지침화된 예설을 통해 실용성을 강조했고, 저자의 안설(按說)을 통해 명확한 행례의 기준을 제시했다. 1844년(헌종 10) 간행된 이후 여러 판본으로 재간행되었고 20세기 초반 방각본 『증보사례편람』이 유통되면서, 『사례편람』은 조선의 대표적인 예서로 인정받게 되었다.
『사례편람(四禮便覽)』의 저자는 이재(李縡, 16801746)로, 자(字)는 희경(煕卿), 호(號)는 도암(陶菴) · 한천(寒泉), 본관은 우봉(牛峯)이다. 어려서 아버지 이만창(李晩昌, 16541684)을 여의고, 중부(仲父)인 이만성(李晩成, 1659∼1722)에게 가학(家學)을 전수받았다. 어머니 여흥 민씨(16561728)는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언니이고, 외조부 민유중(閔維重, 16301687)은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외손이다. 1702년(숙종 28) 알성문과 병과로 급제한 후 예문관검열을 거쳐, 1704년(숙종 30) 예문관봉교로서 『단종실록』 부록의 편찬을 주청했다. 이후 이조정랑, 동부승지, 예조참판 등을 역임했으나, 1721년(경종 1) 소론(少論)이 집권하자 삭직되었다. 신임사화(辛壬士禍, 17211722)로 이만성이 옥사한 이후로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재는 노론(老論) 산림(山林)으로서, 용인의 한천정사(寒泉精舍)에서 강학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1742년(영조 18)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유명(遺命)에 따라 『율곡전서(栗谷全書)』를 편찬하면서, 이이(李珥, 15361584), 김장생(金長生, 1548~1631), 송시열의 노론 학통을 계승하였다.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하는 낙론(洛論) 학자로서, 호론(湖論)의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비판하는 「한천시(寒泉詩)」를 지어 호락 논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저서로는 『사례편람』 외에 『도암집(陶菴集)』 50권 25책, 『서사윤송(書社輪誦)』 1책, 『주형(宙衡)』 25권 14책, 『삼관기(三官記)』 2권 등이 있다.
『사례편람』은 이재가 사망한 해인 1746년(영조 22)에 완성되었고, 그의 상례(喪禮)에 활용되었다. 이재의 문인들인 박성원(朴聖源, 16971767), 양응수(楊應秀, 17001767), 유언집(兪彦鏶, 17141783), 한경양(韓敬養, 17191774) 등은 스승의 문집 간행을 시도하면서, 『사례편람』을 교정하였다. 그러나 박성원의 사망 이후 문집 간행이 중단되었고, 『사례편람』 역시 필사본으로 전해졌다. 이후 이재의 손자인 이채(李采, 17451820)가 『사례편람』을 교정하여 정본(定本)으로 만들었고, 그 아들인 이광문(李光文, 1778-1838)과 이광정(李光正, 1780∼1850)이 간행을 추진하였다. 1844년(헌종 10) 이광정이 수원유수(水原留守)로 재임 시, 『사례편람』을 목판으로 간행하였고 조인영(趙寅永, 17821850)의 발문(跋文)을 첨부했다.
1844년 간행 이후 『사례편람』은 여러 판본으로 재간행되면서, 조선 말기를 지나 일제강점기에도 널리 활용되었다. 1916년 전주판본, 1937년 완주판본 등이 대표적이고, 1924년에는 활판본으로 『현토주해사례편람』이 간행되었다. 1900년(광무 4)에는 황필수(黃泌秀, 1842~1914), 지송욱(池松旭) 등이 원본을 증보하여 『증보사례편람』을 간행하였다.
조선에서는 ‘『가례』 미완성론’을 토대로 『가례』를 보완하는 다양한 예법에 관한 책들이 편찬되었는데, 고례(古禮)와 선대 유학자들의 설을 참고하여 『가례』의 수행 가능성을 높이는 『상례비요(喪禮備要)』가 대표적이었다. 『사례편람』은 이러한 『상례비요』의 방식에 따라 관례(冠禮)와 혼례(婚禮)를 정비하였고, 『상례비요』에서 완비되지 못한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에 대해서도 수정과 보완을 시도하였다.
『사례편람』은 실용의 편리를 위해, 적극적으로 『가례』의 구조를 개편하고 내용을 수정하고 보완했다. 먼저,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실천을 중심으로 ‘사례(四禮)’ 체제를 완성했다. 『가례』 「통례(通禮)」의 ‘사당(祠堂)’은 「제례」의 첫머리로, ‘심의제도(深衣制度)’는 「관례」 ‘진관복(陳冠服)’의 제구(諸具) 항목으로 이동시켰다. 관혼상제의 실천과 직접 관련되지 않는 ‘거가잡의(居家雜儀)’와 ‘거상잡의(居喪雜儀)’를 삭제했고 주자(朱子)가 이미 실행하지 않았다고 밝힌 「제례」의 ‘초조(初祖)’와 ‘선조(先祖)’ 항목은 수록하지 않았다. 한편, 정문(正文)-본주(本註)-참고설(參考說)-안설(按說)-제구(諸具)-서식(書式)의 구조로 『가례』를 재구성했다. 글자의 크기와 배치 및 단행(單行), 쌍행(雙行) 등의 구분을 통해 『가례』의 내용을 시각적으로 구조화시켰다. 또한 절차를 수행 단위로 세분화한 ‘제구’와 ‘서식’을 확충하여, 행례(行禮)에 필요한 구체적인 지식을 제공했다.
다음으로, 『가례』의 본문을 수정하고 보완하여 실용성을 극대화하였다. 『가례』의 수정은 조선의 시속(時俗)과 절차상의 완결성을 위한 것으로, 「관례」에서 공복(公服)을 삭제하고, 「제례」에서 ‘차’를 ‘끓인 물’로 대체한 경우 등이다. 『가례』의 보완은 행례를 위해 고례와 시속 등을 첨부한 것으로, 「혼례」에서 고례에 따라 염의제도(袡衣制度)를 고증하고 「상례」에서 ‘경험 있고 숙련된 사람’의 실용적 지식을 활용한 경우 등이다. 이러한 작업은 『가례』에 대한 충실한 이해와 더불어 축적된 행례의 경험을 토대로 가능했다.
『사례편람』에는 저자의 정설인 ‘안(按)’이 「관례」에 11, 「혼례」에 6, 「상례」에 100, 「제례」에 19, 총 136건 포함되어 있다. 이재는 『상례비요』의 애매한 양가론(兩可論)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예학적 고증과 판단에 따라 가부를 결정했다. 『가례』의 불명확한 연복제도(練服制度)와 상복의 변제(變除) 절차 등을 재규정했고, 『가례』에서 언급되지 않은 변례(變禮)에 대해서도 새로운 지침을 제시했다. 이러한 안설은 행례의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여 실용성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
『사례편람』은 체계적인 구성과 지침화된 예설을 통해 실용성을 강조한 행례서이다. 이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가례』를 수정 및 보완하고 ‘사례' 체제로 개편했다. 또한 행례를 목적으로 세부적인 절차와 다양한 변례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졌고, 새로운 지침이 정립되었다. 필사본으로 전해지던 『사례편람』이 19세기에 간행되었고, 20세기 초 방각본 『증보사례편람』이 유통되면서, 조선의 대표적인 예서로서 『사례편람』의 위상이 확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