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후기에, 형조판서,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1830년 세자[익종(翼宗)으로 추존]가 죽자 세손부(世孫傅)·우부빈객으로서 나이 어린 세손의 보호에 힘썼다. 1834년 세손이 헌종으로 즉위하자 바로 이조판서에 기용되고, 이어 대제학, 호조·형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면서 훈련대장 등 군사권을 장악한 형 조만영과 함께 풍양 조씨 세도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1839년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기해사옥(己亥邪獄)]을 주도, 그 해 우의정에 올라 『척사윤음(斥邪綸音)』을 찬진(撰進)하였다. 1841년(헌종 7) 영의정이 되어 안동 김씨를 압도하고 풍양 조씨의 세도를 확립했으나 1846년 형이 죽자 실세(失勢), 벼슬에서 물러났다. 1849년 철종 즉위 후 민심 수습의 일환으로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곧 죽었다.
활동사항
김정희(金正喜)와 함께 우리 나라의 금석문(金石文)을 수집, 금석학 연구에 정진하였다. 특히 1816년 성절사(聖節使) 일행을 따라 북경(北京)에 갔을 때 청의 금석학자 유연정(劉燕庭)과 교유, 그에게 조선 금석탁본(金石拓本) 수십 종을 기증하였다.
다음 해 귀국하여 김정희와 함께 비봉(碑峰)에 올라, 앞서 발견했던 비가 진흥왕의 순수비(巡狩碑)임을 확인, 68자를 심정(審定)하여 탁본을 작성하고 함께 엄밀한 고증을 거친 다음 이를 『해동금석존고(海東金石存攷)』와 함께 다시 유연정에게 보내어,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을 편찬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문장·글씨·그림에 모두 능했고 1847년 왕명으로 국조보감찬집청(國朝寶鑑纂輯廳)의 총재가 되어 정조·순조의 두 왕 및 문조(文祖: 익종) 대리청정 때의 보감을 편찬하였다. 뒤에 헌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문과 소차(疏箚)를 모은 『운석유고(雲石遺稿)』 20권이 전하고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고문헌
- 『순조실록(純祖實錄)』
- 『헌종실록(憲宗實錄)』
- 『철종실록(哲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운석유고(雲石遺稿)』
- 『조선도서해제』(朝鮮總督府,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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