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각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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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운옥편
전운옥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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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영리를 목적으로 민간에서 판각하여 간행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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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영리를 목적으로 민간에서 판각하여 간행한 책.
내용

책을 인쇄하여 파는 곳을 방사(坊肆)·서방(書坊)·서사(書肆)·서포(書鋪) 등으로 일컫던 데에서 방간본 외에 사본(肆本)·서방본·서사본·서포본이라고도 불리게 되었고, 그 시초에는 목판에 새겼으므로 방각본(坊刻本)이라 하기도 하였다.

방간본은 중국에서 비롯되었는데 당대(唐代)에 싹터서 송나라의 건안(建安)·마사(麻沙) 등에서 성행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1541년(중종 36) 명례방(明禮坊)에서 인출한 목활자본 ≪한서열전 漢書列傳≫이 초기의 방간본으로 지목되기도 하나 그것이 과연 방간본의 요건인 민간인에 의한 상업적 출판물인지의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현재까지 확인된 최고(最古)의 방간 기록으로는 송석하(宋錫夏)가 소장하였던 ≪고사촬요 攷事撮要≫ 끝장의 간기(刊記)에 ‘만력(萬曆) 4년(1576) 7월’이라 하고, 이어서 “수표교 아래 북변 이제리 수문 입구에 사는 하한수 집에서 각판하였으니 살 사람은 찾아오라(水標橋下北邊二第里門河漢水家刻板買者尋來).”는 광고를 들 수 있다.

≪고사촬요≫는 일종의 백과전서이므로 서리(胥吏:말단 행정관리)는 물론 재야의 선비나 일반 서민들에게 수요가 많은 책이어서 방간본을 발행할 만한 책이었을 것이다.

이로부터 10년 뒤인 1585년(선조 18)에 허봉(許篈)이 속찬한 ≪고사촬요≫도 판식과 판각의 조잡성으로 미루어 방간본일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이것들은 적어도 16세기에는 서울에서 방간이 행해졌음을 입증해 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중종 때에는 서사에서 관서(官書)의 유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법을 정하고 절목까지 마련한 일이 있었고, 명종 때에는 사서(私書)의 장려를 계청(啓請)한 적도 있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

한편 관서에서 찍어낸 활자본은 간행 부수가 한정되어 특정 신하에게만 내사(內賜)되었고, 교서관(校書館)에서 판각한 책도 종수에 제한이 있어 일반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어려웠으므로 민간에게 방간을 허용하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 뒤 임진왜란, 광해군의 폭정, 이괄(李适)의 난, 정묘·병자의 호란 등 큰 재난이 잇따라서 인조 말기까지는 인쇄사업이 침체되었다가 그 기능이 회복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중엽 이후로 여겨진다.

초기의 방간본으로는 먼저 호남지방의 완판(完板)·태인판(泰仁板)·금성판(錦城板)을 들 수 있다. 완판은 서계(西溪)·완산(完山)·완서(完西)·흥패(興沛)·완남(完南)·하경룡(河慶龍) 등의 각판을 총칭하는데, 이 가운데 현존하는 초기의 각판은 서계의 완판으로 1648년(인조 26)에 새긴 ≪사요취선 史要聚選≫을 들 수 있다.

이전에는 1654년(효종 5)에 간행된 완산판의 ≪동몽선습 童蒙先習≫을 최초의 방간본으로 보았으나, 이는 고갑자기년(古甲子紀年)과 간지기년(干支紀年)의 혼동에서 빚어진 연대 착오로서 실은 1774년(영조 50)에 해당하므로 훨씬 후대의 것이다.

태인판은 손기조(孫基祖)와 전이채(田以采)·박치유(朴致維)의 방간본이 널리 알려졌다. 손기조가 자기의 이름을 상호로 한 방간본으로는 1664년(현종 5)에 간행한 ≪명심보감초 明心寶鑑抄≫가 있고, 전이채·박치유가 공동명의를 상호로 한 방간본으로는 1676년(숙종 2)∼1686년 사이에 간행된 ≪고문진보 古文眞寶≫·≪사요취선≫·≪사문유취 事文類聚≫·≪대명률시 大明律詩≫·≪농가집성 農家集成≫·≪구황보유방 救荒補遺方≫ 등이 있다.

이 전이채·박치유 두 사람의 공동명의는 순조 초기인 19세기 초에도 여러 종 나타난 것으로 보아 그들이 죽은 뒤까지도 그것이 상호로써 사용된 듯하다.

금성판으로서 현존하는 초기의 것은 1728년 오문(午門)에서 간행한 <구운몽 九雲夢>이며, 1860년(철종 11) 간행으로 추정되는 ≪어정주서백선 御定朱書百選≫도 전해진다.

방간본은 서울에서 비롯되었으나 지방에서 먼저 성행한 것은 서울에서는 관간본을 구하기가 비교적 쉬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밖에도 안성 등 여러 곳에서 지방 방간본이 나왔으나 대개 그 규모가 작고 간년도 알 수 없는 것들이다.

서울 방간본인 경판본(京板本)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1792년(정조 16) 정동(貞洞)에서 간행된 ≪의례유설 疑禮類說≫이고, 그 다음은 광통방(廣通坊)에서 1804년(순조 4)에 간행한 홍태운(洪泰運) 글씨의 ≪천자문 千字文≫인 것으로 보인다.

서울의 방간본은 상인들이 많이 모이던 중부를 중심으로 정동·무교(武橋)·모교(毛橋)·석정동(石井洞)·유동(由洞)·합동(蛤洞)·미동(渼洞)·남산동(南山洞)·광교(廣橋)·광통교(廣通橋)·동현(銅峴)·효교(孝橋)·어청교(漁靑橋)·송동(宋洞)·야동(冶洞)·자암(紫巖)·홍수동(紅樹洞) 등에서 많이 간행되었다.

서울의 방간본은 서체와 판각술이 정교한 것이 지방의 방간본과 약간 다르다. 이러한 방간본들은 차츰 목활자와 금속활자를 사용하게 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도서의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다양한 방간본을 간행함으로써 독서 인구의 확대에 크게 기여하였다.

방간본에는 ≪천자문≫·≪동몽선습≫·≪명심보감≫ 등 아동용 교재, ≪옥편≫·≪운서 韻書≫ 등의 자전류, 사서삼경 등 유학서, ≪사략 史略≫·≪동사촬요 東史撮要≫·≪통감절요 通鑑節要≫ 등의 역사서 외에 의례집, ≪간독정요 簡牘精要≫·≪천기대요 天機大要≫ 등 실용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가 있으며, 서민들 사이에는 소설류가 특히 인기가 있었다.

한글 서적으로는 1844년(헌종 10)의 <한양가 漢陽歌>를 비롯하여 한말에 이르는 동안 편지투·시조집 외에 40여 종의 소설 등 200여 책에 이르렀다. →인쇄

참고문헌

『고사촬요』(천혜봉, 한국도서관학연구회, 1974)
『한국전적인쇄사』(천혜봉, 범우사, 1990)
『한국서지학』(천혜봉, 민음사, 1997)
「고사촬요의 책판목록」(이인영, 『동양학보』 30-2, 1943)
「방각론고」(안춘근, 『서지학』 1, 1968)
「방각본에 대하여」(김동욱, 『동방학지』 11,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70)
「호남방각본에 관한 연구」(권희승, 성균관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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