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4(철종 5)∼1927. 전라남도 나주 출생. 명창이었던 이날치(李捺致)·박기홍(朴基洪)과는 이종간이다. 어려서부터 함평에서 서편제(西便制)의 명창인 정창업(丁昌業)에게서 판소리를 배워 명창이 되었다.
1908년 7월 원각사가 설치되자 주석(主席)으로 있으면서 많은 가객들을 거느리고 창극을 공연하였으며, 고종의 총애를 받아 의관(議官) 벼슬을 제수받았다. 1909년 11월 원각사가 폐쇄되자 일단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이듬해 전라도 출신의 명인 및 명창을 규합하여 ‘김창환협률사’를 조직하고 지방 순회공연을 하였다.
그러나 1910년 8월 나라를 빼앗기자 방성통곡하고 경상남도 남해에서 협률사를 해산하여 단원들은 각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1919년 고종이 죽자 고향집에서 후원에 사당을 신축하여 고종의 사진을 모시고 근신하면서 후진을 양성하다가 74세로 죽었다.
각종 고전에 정통하였고 그 이전 명창들의 법제(法制)에 대한 견문도 많았다. 또한, 소리는 서편제인 만큼 애원처절(哀怨悽絶)하여 감상적인 계면조를 주로 한 판소리를 했으며, 소리도 잘했지만 풍채가 좋고 발림을 잘하여 관중들을 매혹시켰다고 한다.
더늠(판소리 명창이 사설과 소리를 새로 짠 대목)으로는 「흥보가」 중 ‘제비노정기’가 있는데, 음악적인 구성이 뛰어나 오늘날 여러 명창들이 이 대목을 그의 더늠으로 부르고 있다.
소리는 오수암(吳壽巖)·김봉학(金奉鶴)·조몽실(曺夢實)에게 이어졌는데, 오늘날에는 정광수(丁珖秀)가 「춘향가」와 「흥보가」를 이어받고 있다.
판소리 중 「흥보가」의 ‘제비노정기’·‘집터 닦는 대목’, 「춘향가」중 ‘과거장’, 그 밖에 「농부가」와 「성주풀이」가 음반으로 남아 있는데, 이 음반은 서편제의 특징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